인쇄역사 > 현대

(1) 시련과 극복

1) 해방 직후의 인쇄업계 1945년 8월 15일 우리나라는 36년간의 일제 식민지 지배하에서 해방되었다. 인쇄업계는 특히 다른 업계와는 달리 일제의 우리 글 말살정책으로 크나큰 어려움을 겪었던 터라 해방 당시 각 인쇄소에는 한글활자가 거의 소멸되고 없었다. 당시 대부분의 인쇄소들이 전태자모와 경편자모 활자를 활판소에서 구입하여 사용하였음에도 전국에 수동 주조기가 10여대에 불과해 인쇄소들이 한글활자를 완비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웠다.

1945년 9월 19일부터는 38도선 이남에서 미군정이 실시되었다. 미 군정청이 적산으로서 가장 먼저 접수한 인쇄시설은 조선인쇄주식회사였는데, 언론 출판의 기능을 중시한 그들은 군정의 시책을 대중들에게 보다 잘 알리기 위해 대규모의 인쇄시설이 필요했던 것이다. 해방이 되자 국한문 서적의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되었고 통치기구의 개편으로 행정 서식을 비롯한 각종 인쇄물의 수요가 급증했기 때문에 그동안 깊숙이 감춰 두었던 한글 자모가 다시 햇빛을 보게 되었고 전국의 인쇄업체들은 밤낮으로 가동해야 될 만큼 호황을 누리게 되었다.

그러나 국내에서 조달할 수 있었던 활자와 인쇄잉크 등 몇몇 인쇄 자재는 품질이 낮은 데다가 공급마저 달렸고, 특히 일제 말엽부터 악화되었던 인쇄용지 난은 폭발적인 수요 팽창으로 더욱 악화되었다. 심각한 인쇄용지난을 타개하고자 수입물량을 크게 늘렸음에도 절대량이 부족했다. 여기에다 더욱 심각했던 것은 전력난이었다. 당시의 남한 전력의 42% 정도를 송전하던 북한이 남한만의 단독선거를 트집잡아 1948년 5월 14일을 기해 전면적인 단전을 감행하고 말았다. 이 때문에 대부분의 인쇄소는 전면 휴업상태에 들어가게 되었으며, 그 중에는 석유 발동기나 미군의 자동차 엔진 등을 이용하여 임시 변동으로 인쇄기를 돌리기도 하였다.

기술 부족과 시설 노후도 인쇄업계의 발전을 저해하는 크나큰 요인이었다. 일제 시대에는 일본인 인쇄사 등에서 원색분해가 가능하였으나 해방 후에는 감광재료의 수입난에다 기술부족까지 겹쳐 색분해 작업은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한편, 해방과 더불어 일본인이 주관하던 단체들을 한국인들이 인계를 받아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되었는데, 인쇄업계에서도 1945년 9월 5일 일본측 대표들로부터 경기도인쇄공업조합의 사무를 인계받았다. 1939년 출범했던 경성인쇄공업조합은 경기도인쇄공업협동조합으로 확대 개편되고, 이 조합을 모체로 하여 조선인쇄연합회가 결성되는 등 많은 변화를 겪어 왔지만, 일본의 패망과 함께 한국인 조합원에게 인계된 것이다. 일본인들로부터 인수받은 경기도인쇄공업조합은 1945년 9월 16일 경기도인쇄공업조합을 발전적으로 해산시키고 인쇄업계의 질서를 유지시키고 발전을 도모할 목적으로 조선인쇄문화건설협회를 발족시켰다. 서울 저통의 경기도인쇄공업조합의 사옥을 접수하여 간판을 내건 동 협회는 해방 이후 몇몇 인쇄인들이 뜻을 모아 발족시킨 과도기의 임의단체에 불과했으나 사상 최초로 한국인 인쇄인만으로 구성된 인쇄단체였다.

조선인쇄문화건설협회는 한국 인쇄인들의 유일한 조직체로서 경기도인쇄공업조합 소유의 모든 재산과 권리 및 공동이용 사업까지도 인계받게 되었다. 1948년 7월 17일 제헌국회가 헌법을 제정, 공포함에 따라 국호가 정식으로 대한민국으로 결정되고, 8월 15일에는 정부가 정식으로 수립됨으로써 미군정은 종식을 고하였다. 이에 따라 각 임의 단체는 그동안 사용하던 ‘조선’이란 명칭을 ‘대한’또는 ‘한국’으로 개칭하고, 사단법인의 인가를 관계 당국에 신청하게 되었는데, 조선인쇄문화건설협회도 1948년 8월 11일 사단법인 대한인쇄협회로 새롭게 출범하였다.

2) 6·25 전후의 인쇄업계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북한군의 기습남침으로 야기된 6·25 동란은 일찍이 볼 수 없었던 민족상잔의 비극이었다. 해방 이후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나름대로 자리를 잡아가던 인쇄업계도 재기가 거의 불가능할 정도의 피해를 입게 되었다. 특히 그 중에서도 서울에 있는 인쇄시설은 70% 이상이 파괴되는 등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6·25 동란 중의 국내 인쇄는 주로 부산과 대구 지역에서 현지 인쇄소들과 피난 인쇄소들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전체 인쇄물은 활판 인쇄가 80%, 석판 및 오프셋 인쇄가 20% 정도여서 활판 인쇄가 주종을 이루었다. 서울에서 피난간 인쇄소들 중 부산에는 활판 인쇄소가, 대구에는 석판 및 오프셋 인쇄소가 많이 피난하였는데, 이는 6·25 동란전의 부산에는 활판 인쇄 시설을 갖춘 인쇄소가 적고 오프셋 인쇄소가 많았던 반면 대구에는 활판 인쇄소가 많은데 오프셋 인쇄기는 한 대도 없이 석판 인쇄기만 두어 대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편, 전란의 어려움 속에서도 인쇄인들은 힘을 모아 인쇄 발전을 위한 방안들을 다각적으로 모색하기도 했다. 피난지인 부산에서는 서울에서 소개한 인쇄인들이 동업자 회의 등을 통해 학제 개편에 따른 교과서 인쇄문제와 전쟁의 피해를 입은 인쇄공장의 복구문제, 인쇄자재 소요량 조사에 관한 사항들을 논의하기도 했다. 이는 전시하의 어려움 속에서도 인쇄업계가 재건을 위한 방안들을 상호 모색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6·25 동란 이후 파괴된 시설을 복구하고 재건하기 위해 시설교체 및 기자재 도입도 활발하게 이루어졌으며, 활판 위주의 인쇄에서 벗어나 점차 오프셋 인쇄의 컬러인쇄를 지향함으로써 인쇄기술 발전에 일대 전환기를 맞이하였다. 인쇄기술 도입과 개발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여 활판부분에서는 활자가 읽기 좋고 보기 좋도록 개량되고, 지형의 제작 방법은 습식에서 건식으로 바뀌었으며, 활판인쇄기와 주조기 등은 수동에서 자동으로 변하였다. 오프셋기 위한 동판 인쇄술이 개발되기도 하였다.

3) 인쇄기술의 발전 국내 활판 인쇄소들은 일제시대는 물론 6·25 동란 이후까지도 활자만을 전문적으로 주조해 판매하는 활판소에서 전태자모나 경편자모로 만드는 재래식 서체의 활자를 사용하였다. 문교부는 재래식 한글활자의 서체 개량을 처음으로 시도하여 1950년 2월 가로쓰기용 한글 서체를 현상 모집하고 6·25 동란 중에도 교과용 도서 활자체 개량심의위원회가 연구 검토한 최종 안을 채택한 후, 그 원도로 일본에서 한글 및 한자 자모 4만 여자를 제조해 오려는 방침을 세웠으나 문교부와 함께 사업비를 부담했던 문교서적(주)은 자모를 직접 만들어 오는 것보다는 조각기를 도입하여 원도를 조각하는 것이 훨씬 경제적임을 깨닫고는 벤톤 조각기를 구입하였다.

이에 따라 1954년에는 벤톤 조각기로 새로운 한글 활자를 만들었는데, 이로써 종전의 호수활자 대신포인트 활자시대를 맞이하게 되면서 새로운 활자체의 시대가 열렸다. 그러나 한자의 자모는 새로운 서체의 원도를 개발할 만한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일본에서 도입하여 사용했으며, 주조기 또한 일제 만년식 주조기로 교체하였다. 이와 함께 활판인쇄기도 재래식 소형에서 최신식 대형으로 바뀌고, 지형 또한 습식에서 건식으로 교체되었다.

1950년대에 들어와 우리나라의 제판 및 인쇄기술은 비약적인 발전을 하였다. 그 전까지의 평판인쇄는 인쇄판을 일일이 손으로 그리는 수공제판이 대부분이었다. 일제 때 도입된 사진제판 기술은 일본인들이 독점했기 때문에 한국인 사진제판 시설 및 기술자는 거의 없는 실정이었다. 재래식의 수공제판은 원고를 정활하게 재현복사하는 데 정밀도가 낮고 제판광정에 시간이 많이 소요되었지만, 사진제판은 보다 선명하고 정밀했으며 작업 도한 신속히 해낼 수 있었다.

이러한 인쇄기술이 선진국에서는 1950년을 전후하여 비약적인 발전이 이루어져 흑백인쇄에서 다색인쇄로 이행되는 추세였는데, 국내에는 1954년 경 일본에서 기술이 도입되었다. 또한, 국내 최초의 프로세스 카메라와 150선 스크린 등의 첨단 제판시설을 도입함으로써 '50년대 말경에는 국내 사진제판술도 현저하게 발전하였다. 사진제판술의 발달과 더불어 1956년부터는 동판인쇄에 의한 원색인쇄가 개발되어 전례 없는 성공을 거두면서 국내 원색인쇄 수준도 선진국에 버금갈 만큼 향상되었다.

유네스코와 운크라는 1954년에 문교부를 통해 인쇄시설 자금을 원조하면서 시설의 도입선을 일본으로 지정하였다. 따라서 당연히 일본 기술자들이 와서 기계에 대한 운전 및 사용법을 전수해 주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정부의 강경한 반일정책으로 인해 실행되지 못하자 부득이 사람을 일본으로 보내어 기술을 연수하게 하었는 데, 이것이 국내 인쇄기술의 해외연수 시발점이다.

그후 미국과 서독 등지에서 사진제판과 인쇄기술을 배운 사람들에 의해 커다란 성과를 거두게 되자 각 인쇄소에서도 직원들의 해외연수를 앞다투어 시켰는데, 이들은 모두 해외에서 인쇄기술을 연수한 후 귀국하여 자사는 물론 국내의 인쇄기술 향상에도 크게 이바지하였다.

4) 업계의 발전 노력 휴전 이후 사회가 어느 정도 안정되자 인쇄문화 향상과 인쇄업계 발전을 위한 다각적인 노력들이 전개되었다. 이 중 인쇄문화의 우수성을 널리 알리고 인쇄에 대한 인식을 제고시키기 위한 인쇄문화 전시회가 50년대 후반에 네 차례나 개최되어 많은 호응을 얻었다.

이러한 인쇄문화 전시회들은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정성들여 만든 각종 인쇄물의 품질이 선진국 수준에 도달하고 있음을 대내 외에 과시함으로써 인쇄업계에 대한 일반인들의 인식을 제고시키는 한편 인쇄인들에게도 자긍심을 심어 주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인쇄업계 최초의 국제교류는 1957년 10월 10일부터 일본 동경에서 개최된 아시아인쇄인회의에 4명의 대표단을 파견한 것이다. 일본, 필리핀 등 11개국에서 참가했는데, 국내 인쇄업계로서는 최초로 참가한 국제회의였다.

또한, 1960년 10월에는 일본 인쇄문화전 및 인쇄기자재전에 시찰단이 파견되어 전시회를 참관한 것을 물론 인쇄기계 및 인쇄 재료 업체까지 시찰하고 귀국하였다.

인쇄인들의 국제교류 활동은 이를 계기로 더욱 활성화됨으로써 인쇄 관련 신기술 도입과 기술개발 동향을 파악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공보처에서는 1958년에 정부 직영의 인쇄공장을 설치하여 정부 간행물 등을 일괄 생산할 수 있는 대규모의 인쇄시설을 도입할 것이라는 계획이 전해졌다. 인쇄인들은 이를 저지하기 위해 전국의 인쇄업체가 총궐기하여 반대투쟁을 적극 전개한다는 방침을 세우고 강력히 대응했다. 정부 인쇄공장은 인쇄인들의 반대에 부딪힌 데다 미국국제협력국(ICA)의 원조 자금의 대폭 삭감으로 차질을 빚자 1960년 초에 이르러 취소되고 말았다.

1958년 10월부터는 인쇄인들이 하나가 되어 인쇄업에 대한 특별행위세 부과철폐운동을 적극 전개하였다. 특별행위세는 당시 유흥업소나 유흥에 유사한 비생산업종에 부과되던 세금이 었는데, 인쇄 및 제책업에도 특별행위세를 부과하고 있었다. 인쇄인들은 특별행위세를 철폐해 줄 것을 수 차례에 걸쳐 건의한 결과 내무부는 지방세 조례를 개정하여 1960년부터는 세금 감면의 혜택을 받게 되었다.

또한, 국산잉크의 품질이 나빠 어려움을 겪자 상공부 등에 진정서를 보내 국산잉크의 품질이 향상될 때까지 몇몇 종류의 잉크에 대하여 조건부로 수입할 수 있도록 승인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 문제는 국내 잉크 생산업체들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혔으나 인쇄인들의 의견이 받아들여져 특수잉크는 수입하기로 결의를 보았다. 이처럼 인쇄인들은 업계에 현안문제들이 발생할 때마다 굳게 뭉쳐서 문제가 해소되거나 요구사항이 관찰될 때까지 적극적으로 대응함으로써 많은 성과를 거두고 발전의 마련할 수 있었다.

컴퓨터를 활용하여 공정 전체를 체계화시킴으로써 원가절감과 품질향상을 실현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중에서도 문자조판은 컴퓨터화가 진행되면서 가장 많은 발전을 하였다. 1986년에는 국내에서도 전산사식 시스템이 개발되었다. 전산사식 시스템은 개인용 컴퓨터를 입력기로 사용하여 비용도 대폭 절감할 수 있어 수동 사식업체들이 전산사식으로 전환하였다.

또한, 제판분야도 토탈 스캐너 시대로 이행되어 전자출판의 발전과 함께 문자 입력과 컬러 스캐닝, 레이아웃, 컬러 수정 등 조판과 제판의 공정을 한 라인으로 통합시켰으며, 인쇄분야 또한 고속화 및 대형화되는 동시에 조작이 간편해지는 등 꾸준한 개선이 이뤄져 왔다. 나아가 인쇄기의 경우 색맞춤 작업의 자동화 체제로 잉크 공급량 자동조절 장치가 개발되었고, 핀트 자동맞춤 장치도 일반화되어 대부분의 다색 인쇄기에 장착되었다. 인쇄기의 주변장비도 자동화되었는데, 여러 대의 인쇄기에 인쇄잉크를 동시에 공급하는 잉크 중앙공급장치나 인쇄기 가동중에도 온라인으로 품질을 점검할 수 있는 자동화 장비 등이 개발되어 품질 및 생산성 향상에 크게 기여하게 되었다.

5) 인쇄물의 수출 증대 우리나라가 수출 신용장을 개설해 본격적으로 인쇄물 수출을 시작한 것은 1964년 3월 삼화인쇄(주)가 일본에 책자의 지형을 수출하며서부터이다. 물론, 인쇄물 수출은 '50년대 말 미국의 전사물을 소량 수주하고 정부에서 발주한 해외용 인쇄물을 제작하기도 했지만 이들은 간접적인 수출에 지나지 않았다. 60년대 당시 일본의 출판사들은 조판 지형과 전사물의 상당량을 대만에 발주하고 있었는데, 이 사실을 안 우리 인쇄업계는 일본 인쇄물 유치에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하여 인쇄물을 수주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를 위해 일본측은 일본국제문화교역주식회사를 설립하여 인쇄물의 해외 수주를 전담토록 하였고, 우리측은 1964년 9월 대한인쇄공업협동조합연합회 내에 인쇄수출진흥회를 조직하여 수출상담을 시작했다.

1965년에는 베트남 파병을 계기로 베트남 교과서 인쇄수출협의회를 구성하고 대표단을 파견하여 수출계약을 체결하였다. 그후 인쇄업계는 인쇄물 수출에 더욱 자신감을 갖고 최신 기술과 시설을 도입하여 수출 품목을 보다 다양하게 개발하고 품질을 향상시켰으며, 해외시장 개척에 힘써 수출 대상국을 다변화시켰다. 이에 따라 국내 인쇄물 수출은 대상국의 경우 초창기의 미국, 일본, 동남아 등지에서 벗어나 유럽과 아프리카 지역으로까지 확대되었으며, 수출 품목도 '80년대에 들어서는 카탈로그나 캘린더 등 고부가가치의 인쇄물 수출이 두드러지게 증가하였다.

정부는 1987년 인쇄업을 수출산업으로 육성하기 위해 수출업무 주무 부서로 문공부에서 상공부로 이관하고 시설개체 자금을 지원, 인쇄산업을 수출산업으로 육성한다는 '인쇄공업 수출 산업화 방안'을 마련하였다. 이 방안은 인쇄물 수출이 저조한 원인을 인쇄업체의 사정상 수출업무 수행 및 시장개척 능력의 부족, 인쇄용지 및 잉크 등 원부자재의 품질 미흡, 복잡한 수출용 원고 필름의 통관 절차 등으로 보고 이들의 개선책을 마련하였다.

정부는 인쇄를 수출산업으로 육성하기 위해서는 노후시설의 개체 및 자동화를 위한 자금을 지원하고, 원자재 공급의 원활화를 위한 외화 대출 지원도 병행되어야 하며, 시설의 다량도입으로 인한 업체간의 과당경쟁 방지와 자금부담을 경감시키기 위해 인쇄업체를 집단화 내지 협동화시키는 것도 육성 방안으로 제시되었다. 인쇄업계는 정부의 육성책에 힘입어 인쇄물의 수출을 증대하기 위해 1989년 9월 수출에 따른 애로사항을 타개하고 수출업무의 원활한 수행을 목적으로 무역진의 수출을 증대하기 위해 1989년 9월 수출에 따른 애로사항을 타개하고 수출업무의 원활한 수행을 목적으로 무역진 홍공사의 지원 아래 대한인쇄공업협동조합연합회 산하에 인쇄수출진흥협의회를 창립하였다. 동 협의회는 세미나 등을 개최하여 인쇄물 수출에 대한 여론 환기와 의욕을 제고시켰으며, 인쇄물 해외사장 개척단을 미국과 유럽 지역에 수 차례 파견하여 신규 바이어 발굴, 해외시장 정보수집 등 활발한 운동을 전개해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3) 세계 속의 한국 인쇄

1) 인쇄업계의 환경변화 1990년대 들어 국내 인쇄업계는 시장이 외국인들에게 개방되고 외국인 기술 연수생을 채용함으로써 세계화와 국제화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정부가 마련한 '외국인 투자 및 기술도입 활성화 방안'에 따라 오프셋 인쇄업의 경우 1996년에 외국인 지분 50% 이하에서 개방된 후 이듬해에 완전 개방되었으며, 경인쇄업과 여타 상업 인쇄업의 경우는 1997년부터 전면개방되었다. 이로 인해 그동안 중소기업 고유업종과 도시형 업종 등으로 정책적인 보호를 받아왔던 인쇄업이 외국인 투자금지 업종에서 자유 업종으로 바뀌게 되었으며, 심각한 물량난을 겪고 있는 국내 인쇄업계에 어려움을 가중시키는 요인으로 등장하였다.

1994년에는 극심한 인력난을 겪고 있는 인쇄업계에 외국인 기술 연수생이 처음으로 배정되었다. 이들은 제조업체의 기능인력난을 해소하기 위해 정부가 추진한 외국인 산업인력 협력사업에 따라 입국한 근로자들로, 인쇄가 젊은 세대들에게 3D 업종으로 인식되어 취업을 기피하는 탓에 기능인력이 부족하여 조업단축과 인건비 상승에 따른 경영난 악화를 겪자 이러한 어려움의 해소를 위해 시도된 조치였다.

한편, 컴퓨터 기술을 활용한 인쇄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하여 작업공정의 단순화와 자동화를 가능케 함으로써 생산성을 향상시키고 신제품을 개발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으며 인쇄환경까지도 변화시켰다. 개인용 컴퓨터의 보급 확대 및 프로그램의 기능 향상으로 사무가 자동화되면서 간단한 서류 등은 사무실에서 자체 처리가 가능할 정도로 문자조판에 일대 혁명이 일어났다. 인쇄기구인 프린터 또한 품질과 성능이 크게 향상되어 레이저프린터까지 보편화되면서 경인쇄물 시장을 축소시켰다.

제판분야에서는 사진이나 화상의 표현방식이 필름에서 자기녹화 방식으로 전환되어 수작업으로 했던 작업을 컴퓨터의 모니터에서 화상을 변조하거나 합성하는 방법으로 신속하면서도 손쉽게 분판용 필름까지 제작해 내고 있다.

화상의 모니터에서 화상을 변조하거나 합성하는 방법으로 신속하면서도 손쉽게 분판용 필름까지 제작해 내고 있다.

화상의 디지털화와 기억매체의 고기능화로 원고 제작에도 많은 변화를 가져왔으며, 교정 인쇄물도 제판용 필름이 완성되기 전에 간단하게 교정하는 방식이 실용화되었다.

근래 들어서는 인쇄물 수요 형태의 변화와 소비자들의 욕구에 부응하기 위해 다양한 특수인쇄가 개발되어 각종 산업분야에서도 폭넓게 활용되고 있다. 종전에는 인쇄라 하면 일반적으로 종이를 소재로 하는 것으로만 생각되어 왔으나 오늘날에는 물과 공기를 제외하고는 우리의 생활 주변에서 볼 수 있는 거의 모든 소재에 인쇄가 가능할 정도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컴퓨터 산업과 관련 기술의 발전도 인쇄물 수요에 커다란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 CD롬 등 전자 출판물이 사전류와 어학용 교재분야에서 급성장을 보여 책자 인쇄물의 영역이 침식당하고 있으며, 전자통장과 전자카드까지 출현하여 각종 서식류 인쇄물 시장을 축소시키고 있다.

2) 인쇄문화 보존 노력 인쇄인들은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를 발명한 선조들의 얼을 되살리고 인쇄문화를 중흥시켜 인쇄종주국의 영예를 회복시키고자 하는 의지를 가지고 인쇄문화 향상을 위해 힘쓴 결과 여러 분야에서 많은 결실을 거두었다. 이 결과 인쇄인들의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한 인쇄문화상과 찬란했던 인쇄문화의 영광을 되새기고 재현해 나가자는 취지에서 인쇄문화의 날이 제정되기도 했다.

인쇄문화상은 인쇄문화 창달에 현저한 공적이 있는 사람에게 사상하여 투철한 사명감과 지니고 인쇄문화 향상에 기여토록 하기위해 경영관리·기술·특별 등 3개 부문으로 나뉘어 매년 시상해 오고 있으며, 인쇄문화의 날은 1988년 인쇄문화를 중흥시켜 다시 한번 꽃 피운다는 취지아래 훈민정음을 창제한 이후 최초의 한글 금속활자로 《석보상절》을 찍어 낸 9월 14일로 정하여 기녀머해 오고 있다.

한편, 우리의 우수했던 옛인쇄문화를 길이 보존하고 널리 알리기 위한 청주고인쇄박물관이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본인《직지》를 인쇄했던 홍덕사지에 세워져 1992년 3월 17일 개관하였으며, 1999년에는 현대까지의 인쇄문화 발달사를 한 눈에 살펴볼 수 있도록 인쇄 관련 각종 자료 및 기자재까지 보완하여 자료실을 확충하였다. 이로써 인쇄관련 각종 유물들을 체계적으로 전시하여 교육자료 등으로 활용하는 한편, 영구히 보존함으로써 우리 인쇄문화의 우수성을 널리 알리고 세계 인쇄문화 발상지로서의 위치를 확고히 할 수 있게 되었다.

인쇄문화의 우수성을 널리 알리기 위한 관련 전시회가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수 차례에 개최됨으로써 국내외인들에게 우리 인쇄문화에 대한 인식을 제고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1988년에는 우리나라에서 올림픽이 개최된 것을 계기로 청주고인쇄박물관에서 '한국고인쇄특별전'이 개최되었으며, 1990년에는 우리나라가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를 발명한 인쇄문화 종주국임을 알리는 '한국고인쇄 1300년전'이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개최되었다.

또한, '책의 해'인 1993년에는 책의해조직위원회 등이 주최한 '옛인쇄문화특별전'이 청주고인쇄박물관에서, '한국의 책문화-출판·인쇄 1300년전'이 국립박물관에서 각각 개최되어 성황을 이루었다. 그리고 2000년에는 '청주인쇄물판람회'가 대규모로 열려 고대 인쇄출판물부터 현대의 전자출판물에 이르기까지 인쇄 및 출판문화의 발달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했다.

우리나라 인쇄문화의 우수성을 외국인들에게까지 알리기 위한 해외 전시회도 개최되었는데, 청주고인쇄박물관은 1995년 미국에서 '한국의 옛인쇄문화전'을 열어《직지》등의 고서 전시와 함께 금속활자 및 목활자의 인쇄과정을 실연하고, 비디오 상영과 안내 팜플렛을 배포하여 우리나라가 세계 인쇄문화의 발상지임을 널리 알렸다.

한편,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본인 《직지》를 되찾아오자는 운동과 국내에 남아 있을지도 모를 직지를 발굴하자는 운동이 인쇄인들을 중심으로 활발히 전개되어 시민운동으로까지 확산되었다. 인쇄인들은 직지를 프랑스로부터 되찾아오기 위해 1993년에 법업계 차원에서 결의문을 채택하고 관계당국과 각계 요로에 건의서를 제출했으며, 신문과 방송 등 대중 매체를 통한 홍보활동도 활발히 전개하였다.

이와 함께 1997년부터는 국내에 있을지도 모를 《직지》를 찾기 위한 운동도 인쇄인들을 비롯해 각계 각층에서 활발히 전개되었다. 청주 시민회는 직지찾기운동본부를 발족시켜 《직지》를 최초로 제보하거나 발견한 사람에게 1천만원의 포상금을 지급키로 했다가 1998년에는 1억원으로 올렸으며, 파리 국립도서관에 있는 직지 반환운동도 함께 전개하였다. 《직지》를 찾기 위한 이 같은 노력들이 가시적인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지만 우리 인쇄문화의 우수성을 재인식하고 대내외적으로 알리는데 크게 기여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위원회는 1995년 목판 인쇄술의 극치를 보여주는 팔만대장경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함으로써 우리 인쇄문화의 우수성과 독창성이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또 하나의 계기가 마련되었으며, 문화재의 훼손방지와 영구보존을 위해 세계유산기금으로부터 재정 지원도 받게 되었다.

또한, 1995년에는 독일의 구텐베르크 박물관이 한국실을 기존의 두 배 규모로 확장함으로써 우리 인새문화의 우수성이 외국에서도 널리 인정받을 수 있게 되었다.

또한, 1995년에는 독일의 구텐베르크 박물관이 한국실을기존의 두 배 규모로 확장함으로써 윌 인쇄문화의 우수성이 외국에서도 인정받을 수 있게 되었다. 우리의 인쇄문화를 세계에 널리 알리기 위한 정부 차원의 노력도 계속되었다.

정부는 1991년 9월 24일 우리나라의 유엔 가입을 경축하고 한민족의 우수성을널리 알리기 위해 《월인천강지곡》 인쇄 동판을 유엔에 기증했다. 우리나라의 문화유산 중에 세계의 자랑할 만한 것이 많이 있음에도 인쇄동판을 기증했다는 것은 인쇄문화가 민족문화의 근원임을 입증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공보처 해외공보관은 1995년 인쇄문화 등 우리의 전통과 문화예술의 특징을 담은 《한국의 문화유산》이라는 영문판 소책자 시리즈를 펴내 주한 외국 공관과 대학 등에 배포했는데, 이 중 인쇄문화를 소개한 제2권은 원색화보로 금속활자의 제작과정을 소개하고, 갑인자와 계미자 등에 대해서도 상세한 설명을 곁들였다.

3) 인쇄산업의 육성 정부는 1985년 중소기업 근대화사업을 도모하기 위하여 관련 기술의 파급효과가 크고 수출확대와 수입 대체에 기여할 수 있는 업종을 중소기업 고유업종으로 확대해 지정했는데, 인쇄업은 이러한 점들이 인정되어 중소기업 우선 육성업종으로 지정되었다.

이에 따라 인쇄업체는 중소기업진흥법의 규정에 의해 시설 및 운전자금의 지원 및 세제혜택을 비롯한 기술과 경영지도, 연수교육, 정보제공 등 각종 혜택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나아가 이듬해에는 중소기업 사업조정법을 개정, 상업인쇄업 등이 법률에 의한 제도적인 보호를 받게 되었다.

1986년에는 건축법 시행령과 환경보전법 시행규칙의 개정에 따라 도시 내 주거 및 상업 지역에서의 배출시설의 설치가 금지되어 왔던 인쇄 및 사진제판 시설의 규제 기준을 완화하였다. 이에 따라 인쇄업체도 일정 규모의 폐수처리 시설을 갖출 경우 주거 및 상업 지역이라 하더라도 배출시설의 설치가 가능하게 되었다. 정부의 이러한 일련의 보호육성책은 인쇄업이 도시형 중소기업 업종이고 국내 산업발전에도 지대한 공헌을 하고 있음을 인정한 것으로 인쇄업계 발전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또한, 정부의 수도권 정비계획에 부응하는 한편 생산성 제고 및 품질향상을 통한 국내 인쇄산업의 발전을 획기적으로 도모하기 위한 인쇄공단 조성사업이 많은 인쇄인들의 관심 속에서 1988년부터 추진되었다.

1991년 6월 12일에는 본 사업을 전담할 파주인쇄공업사업협동조합이 86개 업체가 참여한 가운데 창립총회를 갖고 출범한 이래, 수도권에 대규모 공단조성을 금지하는 관련 법규 등으로 인해 추진 과정에서 다소의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2001년에 경기도 파주시 조리면에서 완공을 보아 본격 가동에 들어갔다.

이와 함께 중소 인쇄업체의 협업경영을 통해 공동생산 체제를 구축하고자 하는 서울 아파트형 인쇄공장이 성동구 성수동 2가 277-7의 765평의 대지 위에 지하 2층, 지상 4층으로 완공되어 1993년 3월부터 가동에 들어갔다.

한편, 1994년부터는 서울시의 주관 하에 중구 충무로 4가 일대 3만평 부지에 인쇄 타운을 조성하는 계획이 추진되고 있다. 본 계획은 충무로 일대의 인쇄 골목을 세운상사 전자타운 같은 빌딩 군으로 재편, 저층엔 인쇄공장을 고층엔 디자인과 편집 등 관련업체를 배치할 계획이다.

이 지역에 밀집된 인쇄사들은 그동안 건물의 노후와 도로 등 기반시설의 미비로 시설 현대화를 이루지 못해 인쇄타운 조성을 희망해 왔는데, 사업이 완료되면 작업 환경 개선과 시설 현대화를 꾀할 수 있어 이 지역 인쇄사들의 경쟁력 향상에 크게 기여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출처:대한인쇄조합연합회 40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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