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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금속활자 인쇄

1) 금속활자의 종류

조선시대의 금속활자는 고려에서 이어받은 기술을 더욱 발전시켜 찬란한 인쇄문화를 일궈냈다. 금속활자는 종류가 매우 다양하고 수량이 많아 활자의 명칭을 대체로 제작년도의 간지를 따서 붙였으나, 경우에 따라서는 활자를 만든 기관이나 글자체, 혹은 글자본을 쓴 사람의 이름과 활자의 용도 등을 따서 붙인 경우도 있다.

이들 금속활자는 선조 25년(1592)에 일어난 임진왜란으로 인해 활자가 대부분 유실된 탓에 전란 전후 사이에는 많은 차이와 변화를 보이고 있다. 또한, 전란 전까지는 대부분의 활자가 왕의 칙명에 따라 교서관 등에서 주조되었기 때문에 품질도 우수했으나, 현존하는 주요 인본과 활자들을 중심으로 주요 금속활자의 종류를 개략하면 다음과 같다.

계미자 태종대에 들어와 유생들이 크게 늘어나 책이 부족하여 어려움을 겪자, 태종 3년(1403)에 주자소를 설치하고 수십만 자의 동활자로 만들어 책을 인출한 활자이다. 본 활자는 조선시대 최초의 금속활자였음에도 글자체가 크고 고르지 않아 오랫동안 사용되지는 못하고, 세종 2년(1420)에 경자자를 주조하면서 모두 녹여버렸다. 이는 《직지》보다는 26년 이후의 거서이지만, 독이리의 구텐베르크가 금속활자를 만들어 사용한 1440년경보다는 40여 년이나 앞서 우리나라의 금속활자가 세계 인쇄사에 뚜렷한 자취를 남겼음을 입증한다.

경자자 계미자를 개량하고자 세종 2년(1420)에 주조하기 시작해 2년간에 걸쳐 완성했다. 활자의 모양은 끝이 송곳처럼 뾰족했던 계미자와는 달리 네모 반듯한 입방체로 고쳤으며, 인쇄방식도 밀랍을 판을 녹여서 글자를 배열하던 방식을 개량해 글자 모양에 알맞게 인판을 만들고 죽목으로 공간을 매우는 방법을 활용함으로써, 밀랍을 절감하면서도 인쇄량과 인쇄효과는 오히려 높여 인쇄술의 많은 발전을 보게 되었다.

갑인자 세종 16년(1434)에 경자자의 글자체가 너무 세밀하여 읽기가 불편하자 좀더 큰 형태의 금속활자로 개주하기 위하여 만들어 가장 오랫동안 사용되었다. 본 활자는 이전의 감독 아래 장영실, 이순지 등 천문기기를 제작하던 과학 기술자들이 명나라 초기의 간본인 《논어》와 《효순사실》등의 글씨를 자본으로 하고, 부족한 글자는 훗날 세조로 즉위한 진양대군의 글씨로 보완하여 2개월 만에 20여만 자를 주조하였다. 전문 기술자들이 제작했기 때문에 글씨체가 단정할 뿐만 아니라 활자의 모양 또한 정교하다.

훈민정음자 세종이 훈민정음을 창제한 후 어제서문과 훈민정음의 음가 및 운용법을 밝힌《훈민정음》을 목판본으로 간행한 데 이어, 이듬해에는 최초의 한글 활자를 만들어 《석보상절》과 《월인천강지곡》등을 간행하였는데, 이때 사용된 활자이다.

이들 한글 활자는 세종이 훈민정음을 창제하고 곧바로 주조하여 우리도 고유의 문화민족임을 상징케 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매우 크다. 현존하는 인본을 보면 유려하고 부드럽게 운필된 필서체인 초주 갑인자와 강직하게 직선으로 그은 인서체인 한글 활자가 서로 조화있게 배열되어 있다. 이 중 《석보상질》은 세종 29년(1447)에 한글 활자가 처음으로 사용하여 인출된 점에 의미를 부여하여 인쇄업계에서는 이 책이 간행된 날(9월 14일)을 ‘인쇄의 날’로 제정하였다. 또한, 《월인천강지곡》인본은 고딕체인 한글 활자와 갑인자가 잘 조화되어 있는데, 우리나라 1991년 유엔에 가입했을 때 증정한 기념품이 바로 이 책의 인쇄 동판이다.

경오자 문종 원년인 경오년에 주조되었으나 세조 즉위 원년에 을해자로 개주되었으므로 사용된 기간은 겨우 6년밖에 되지 않는다. 따라서, 현존하는 본 활자의 인본은 매우 희소하며, 그나마 대부분이 일본에 있고 국내에는 겨우 잔존본이 산재한다.

을해자 세조 원년(1455)에 안평대군이 쓴 경오자를 녹인 후 강희안의 글씨를 글자본으로 하여 개주한 활자이다. 강희안은 당대의 명필가로서 진체와 촉체를 겸한 서법에 능할 뿐 아니라 조선 전기의 3대 회화가 중의 한 사람이었는데, 을해자는 촉채인 송설채보다는 진체인 해서체에 가까운 편이다. 본 활자에는 큰 자, 중간 자, 작은 자의 3종류가 아니라 전란 후에도 올해자체 목활자를 만들어 혼용하면서 실록 인출에 사용되었기 때문에 인본이 매우 많이 전해 오고 있다.

갑진자 성종 15년(1484)년 을유자를 녹여서 큰 자부터 만들기 시작하여 다음 해에 작은 자까지 완성함으로써 30여만 자를 주조하였다. 활자체는 갑인자나 을해자보다 소형인데, 인쇄에 알맞도록 글자형의 짜임새가 잘되어 있다. 글자본은 《구양공집》과 《열녀전》에서 발췌하고 부족한 글자는 박경이 보완하였는데, 이로 찍은 인본은 지금까지 다수가 전해 오고 있다.

계축자 성종 24년(1493)에 새로 주조된 활자이다. 본 활자는 명나라의 새로운 판본인 《자치통감강목》을 글자본으로 삼아 큰 자와 작은 자의 두 종류를 만들었다. 글자가 너무 작고 획이 가늘어 인쇄상태가 깨끗하지 못한 갑진자의 결점을 보완하기 위해 만들었음에도 주조 솜씨는 오리혀 뒤떨어진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중종 중기까지 40여 년 동안 사용되면서 《동국여지승람》들을 인출해 냈다.

성종실록자 조선시대의 왕조실록은 4부씩 정사 또는 인쇄하여 춘추관, 전주, 충주, 성주의 각 사고에 분장하였는데, 태조부터 태종의 3대의 실록은 사본으로 되어 있고 세종부터 예종까지의 실록은 을해자로 인출되었다. 그러나 성종부터 명종에 이르기까지 5대의 실록은 인출된 시기가 각각 다름에도 같은 활자로 인출되었는데 이 활자를 총칭하여 성종실록자라고 부른다.

병자자 금속활자가 간간이 유실되자 목활자로 보충하였으나 마모가 심해 중종 11년(1516) 주자도감을 설치하고 만들기 시작하여 동왕 14년(1519)인 기묘년에야 완성하였으므로, 기묘자라고도 부른다. 글자본은 명판본인 《자치통감》으로 하고 갑인자와 갑진자를 개주하였다.

본 활자는 중종 대부터 선조 대까지 약 60여 년 동안이나 사용되었다.

재주 갑인자 선조 때 들어 갑인자를 두 번째로 주조한 동활자이다. 본 활자는 경진년에 주조되었으며 초조갑인자에 비하면 정교도가 떨어져 글자체가 조금 투박하고 글자획이 운필의 형태를 띠고 있어 발력이 없어 보이지만, 이후에 계속해서 주조된 개주 갑인자들보다는 낫게 만들어졌다.

인력자 관상감(서운관)에서 각종 역서를 찍은 활자다. 임진왜란 때 유성륭이 진란의 수습을 지휘하고 명령한 것을 기록한《대동력》을 보면 쇠활자 큰 자와 작은 자로 찍혀 있다. 본 활자의 재료는 무쇠로 여겨지고 주조 솜씨가 비교적 정교한 편이다. 특징 중의 하나는 연주활자가 많이 쓰인 점인데, 자주 쓰이는 날짜, 간지, 절기 등은 두 글자가 하나의 글자처럼 잇따라 주조되어 있다.

선조실록자 임진왜란으로 인해 전주 사고본을 제외하고는 모든 왕조실록이 소실됨에 따라 이를 시급히 복구하기 위해 전란 후 교서관에 남아 잇던 금속활자 일부와 목활자를 보충해 사용한 활자이다.

효종실록자 현종 2년(1691)에 인출된 《효종시록》에 사용된 활자로 선조실록자에 비해 글자체가 단정하여 인본의 체제가 휠씬 정돈되어 있다. 본 활자의 인본은 《효종실록》외에는 전혀 보이지 않아 이용범위가 극히 국하니되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현종실록자 숙종 3년(1677)에 《현종실록》을 인출하기 위해 본래 낙동계라는 민간 단체가 만들어 사용하던 금속활자 3만5천여 자를 구입하고 새로 주조한 4만여 자를 합한 활자이다.

본 활자의 글자체는 단아한 진자체로 되어 있어 조선조 말기까지 역대 실록의 인쇄에도 계속해서 사용되었다.

한구자 김석주가 숙종 초(1677년경)에 당대의 명필가인 한구의 필서체 작은 글씨를 바탕으로 하여 사적으로 만든 활자이다. 본 활자는 김석주가 죽자 교서관으로 이관해 영조 초기까지 각종 서적의 인쇄에 사용되었다. 초기의 인본은 대체로 정교하나 차츰 활자에 마멸이 생겨 인쇄가 깨끗하지 못하자 정조 6년(1782)에는 본 활자를 재주했는데, 이를 재주 한구자 또는 만든 해의 간지를 붙여 임인자라고 부른다.

재주 한구자는 그후 주자소로 옮겨져 사용되었으나 화재로 모두 소실되자 철종 9년(1858)에는 규장각 관리들에게 명하여 삼주 한구자를 다시 주조하였다.

교서관 인서체자 명체를 모각하여 교서관에서 만든 활자로, 일명 당자라고도 부른다. 명나라의 인서체가 최초로 도입된 본 환자의 특징을 종래의 모필체와는 달리 서구의 프린트식 글자체를 연상시킬 만한 새로운 면모를 보이고, 재질 또한 종례의 동과는 달리 칠(무쇠)로써 만들어졌다.

원종자 숙종 19년(1693)에 원종이 쓴 글씨를 바탕으로 하여 주조한 통활자를 말한다. 그리고 국역문을 찍기 위해 한글활자도 주성하였는데, 이를 원종 한글자라고 일컫고 있다. 본 활자는 주조가 정교하여 예리한 필서체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으며, 한글활자도 인서체에서 필서체의 구성으로 바뀌는 특징을 나타낸다.

율곡전서자 영조 25년(1749)에 홍계희가 스승인 이재가 엮은 《율곡선생전서》를 인출하기 위해 사사로이 주조한 동활자이다. 본 활자는 《강희자전》의 글씨체를 닯게 쓴 고딕 인서체인데, 생생자와 정리자가 만들어지기 40여 년 전에 이미 중국 서체의 영향을 받은 활자라는 점에서 조목된다.

정유자 정조 원년(1777)에 평양감사 서명웅에게 명하여 갑인자 15만 자를 더 주조토록 한 통활자이다. 본 활자는 정조 원년에 주조된 이후 순종 3년(1909)에 이르기까지 130여 년 동안이나 관서의 문서나 서적들을 인쇄하는 데 사용되었지만, 글자형이 비교적 큰 탓에 정리자나 전사자보다는 널리 이용되지 못했다.

정리자 정조 19년(1795) 목활자인 생생자를 글자본으로 하여 만든 통활자이다. 본 활자는 본래 《정리의궤통편》을 찍기 위해 주조한 데서 그 명칭이 붙여졌는데, 글자체가 보기 좋고 크기가 적당한 인서체여서 구한말에 이르기까지 관서의 공문 및 서적 인쇄에 널리 사용되었다. 특히 고종 20년(1883)에 근대식 납활자가 수입되어 각 부문의 인쇄에 다양하게 사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본 활자는 외국과의 조양서나 갑오개혁 이후의 관보 또는 학부가 편짐한 교과서 등에 이르기까지 널리 사용되었다.

철활자 조선조 말기에 이르러 민간인들이 직접 활자를 주조하여 상업적으로 사용한 경우가 있었는데, 이 중에는 활자의 재질을 동이 아닌 철을 사용해 만든 활자를 총칭한다. 주로 민간의 문집, 족보 및 일반 서적 인쇄 등에 널리 이용되다가 이후 관서의 서책 인쇄에도 사용되었다. 이들 활자는 무엇보다 종전까지의 관서 위주의 인쇄에서 벗어나 민간 인쇄를 촉진시키고 시민 문화와 시민 의식 계발에 크게 기여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취진자 순조 15년(1815)에 처음으로 면모를 보이는데, 이는 초인본 문집의 머릿글에 취진판본이라고 적혀 있는데서 유래한다. 본 활자의 인본은 관서의 서적에는 보이지 않고 사가 문집만이 전해 온다. 또한, 인본의 체제나 표지, 장정 등은 거의 대부분이 당본을 그대로 모방하였는데, 이는 우리나라의 인쇄술이 차츰 퇴조되기 시작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전사자 순조 22년(1822) 청의 건륭칙판인 21사자를 글자본으로 하여 주조한 활자로 인서체의 일종이다. 본 활자의 이름은 남공철의 문집에 적힌 전사체가에서 유래하는데, 순조의 외삼촌이었던 박종경이 사사로이 만든 인서체 활자이다. 그러나 본 활자는 관청의 소유로 돌아갔는데, 활자의 모양은 근대식 납활자와 같이 크기가 적당하며 주조가 정교하여 널리 애용했기 때문에 인본이 많이 전해 오고 있다.

2) 주조와 인쇄방법

조선시대의 금속활자 주조 방법은 시대에 따라 다르며, 관서와 사찰 그리고 민간인 등의 주조 주체에 따라서도 다르게 각각 나타나고 있다. 이 중 중앙 관서에서 금속활자를 주조한 방법에 대한 기록은 조선시대 성종 때 간행된 성현의 《용재총화》에서 처음으로 보인다.

기록에 의하면 먼저 글자 본을 정하고 글씨를 잘 쓰는 사람이 쓰거나, 이미 간행된 책의 글자를 본으로 삼을 경우는 책에서 글자체를 가려내고 부족한 글자는 인본의 글자체와 닮게 써서 보충하였다. 그런 다음 바닷물에 담가 진을 뺀 나마로 각목을 만들고 글자 본을 뒤집어 붙여 새긴 후 크기가 일정하도록 정밀하게 손질했다. 암수 두 틀로 구성된 거푸집에는 개발의 해감 모래를 채로 쳐서 고루 다지고 면을 편편하게 한 다음 준비해 둔 어미자를 줄을 맛춰 심고 윗물이 흘러 들어가는 홈을 만들었다.

거푸집의 암수 두 틀은 서로 달라붙지 않도록 표면에는 숯가루를 고루 뿌려 결합시키고 잘 다진 다음 조심스럽게 분리하고 어미자를 뽑아 내었다. 어미자가 있었던 자리에는 글자 모양의 홈이 생기는데, 여기에 쇳물을 부었다. 쇳물이 응고되어 활자가 완성되면 이를 때어 내어서 거스러미를 제거하는 등 손질 작업을 거쳐 제작되었다.

한편, 주로 민간에서 사용해 온 주조 방법은 《동국후생신록》에 소개되어 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찰흙을 곱게 빻아서 잘 빚어 네 둘레에 테를 돌린 나무판에 판판하게 깔고 다져 해볕에 반쯤 말렸다. 글자본은 필요에 따라 쓰거나 기존의 인본을 판 위에 덮고 각수에게 오목 새김을 하도록 했다. 그런 다음 녹인 쇳물을 국자로 떠서 오목 새긴 곳으로 흘러들어 가게 해서 만들고, 이를 하나씩 떼어내어 줄로 깎고 깨끗하게 다듬어 완성시켰다.

금속활자로 판을 짜서 서책을 인쇄하는 방법에는 고착식과 조립식이 있었다. 초기에는 활자의 크기와 모양이 가지런하지 않고 밀랍과 같은 점착성 물질에 활자를 붙여 인쇄하는 고착식이 사용되다가 점차 조립식으로 발전하였다.

고착식은 네 모퉁이가 고정된 틀의 위아래 변에 계선까지 붙인 인판 틀을 마련하고 바닥에 밀랍을 깐 다음 그 위에 활자를 배열하였다. 그 다음 열을 가하여 밀랍을 녹이고 위에서 철판 등으로 균일하게 눌러 활자면을 편편하게 하고 이를 식힌 다음에 인쇄를 하였다. 고려시대의 활자인 복자의 뒷면을 보면 타원형으로 파져 있는데, 이는 밀랍을 채워서 움직이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 계미자도 끝을 송곳처럼 뾰족하게 개량하여 밀랍 속에 박아 움직이지 않게 하였다. 그러나 갑인자에 이르러서는 활자의 네 면을 반듯하게 하고 인판 틀 또는 편편하고 튼튼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판이 크면서도 밀랍을 전혀 쓰지 않고, 활자 사이의 빈 공간을 죽목이나 파지 등으로 메우면서 조립식으로 판을 짜는 기술을 개발했다. 이 방법은 밀랍을 절감하면서도 인쇄량과 인쇄효과는 훨씬 높이게 되었다.

조선시대 후기의 활자를 보면 뒷면을 둥글게 파서 동을 절약하는 한편 밀랍이 꽉 차서 움직이지 않도록 하는 고착식이 병용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때는 밀랍을 참기름과 같은 반건성유와 피마자 기름과 같은 불건성유를 배합, 굳지 않게 하여 열을 가하지 않고도 활자를 밀착시키는 단계로까지 발전시켰다.

3) 활자체의 변천

우리나라의 서체는 삼국시대 때부터 대부분 중국에서 영향을 받았으며, 통일신라 시대의 비문이나 석경등도 당의 구양순이나 안진경의 필법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고려 초기의 금석문들은 거의 구양순체를 모방하였으며, 중기 이후에는 왕희지의 필법이 차츰 유행하였다. 전체인 왕희지의 서체는 위부인체라고도 부르는데, 이는 왕희지가 위부인의 제자로서 그 필법을 이어 받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고려 후기에는 원나라 조송설의 필법이 전해져 크게 유행하게 되었다. 송설체는 촉체라고 부르며, 고려의 금속활자본인 《직지》도 글자획은 진체보다 굵고 글자체는 폭보다는 길이가 긴 촉체에 가까운 장방형 형태를 띠고 있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촉체인 송설체를 많이 사용하였다. 대표적인 서예가로는 안평대군을 비롯하여 박팽년, 정란종, 김인후 등을 들 수 있으며, 이 중 안평대군은 경오자, 정란종은 을유자의 글자본을 쓰기도 했다.

그러나 배원친명 정책을 표방하던 당시에 세종 대에 이르러서는 승문원 사자관들의 필체를 진체로 바꾸게 하였다. 이러한 서법의 전통과 국가의 정책에서 영향을 받아 조선시대 금속활자의 글자체도 많은 파란을 겪지 않을 수 없었고, 이에 따라 활자체는 많은 변천의 자취를 보이고 있다. 즉, 구양순체인 계미자나 경자자는 촉체인 경오자와 을해자로 개주되었으나 얼마 사용되지 못하였고, 정란종이 쓴 을유자도 성종 때 갑진자를 만들 때 녹여지고 말았다.

경오자의 경우 세조가 왕위에 오른 후 정권 탈취 과정에서 의견 대립이 심했던 안평대군의 글자체인 관계로 폐기한 것으로 보이며, 을유자는 필체가 단정하지 못하다는 이유는 있었지만 촉체가 원의 전통 서체임을 감안한다면 당시의 친면 정책과도 관련이 있으리라 여겨진다.

반면에 진체에 속한 금속활자들은 대부분 임진왜란 전까지 계속 사용되었다. 진체와 촉체의 겸용인 을해자의 경우는 글자체의 대소가 인쇄에 적합하도록 균형이 잘 짜여 있어서 진체인 갑인자와 함께 오랫동안 이용되었다. 계축자는 진체에 속하는 활자이면서도 균형이 잘 맞지 않은 결점이 있었던 까닭에 오랫동안 사용되지는 못했다.

조선 후기 금속활자의 글자체는 인서체와 행서체가 새로 도입되어 사용되었다. 또한 서구의 활자체에서 영향을 받은 명체 인본들을 글자본으로 한 교서관 인서체자와 청의 판본을 글자본으로 한 인서체 활자가 등장했다. 본 활자들은 붓으로 쓴 서체들과는 달리 글자획이 서구식 프린트형과 비슷하며, 글자체가 중소형으로 되어 있어서 인쇄에 매우 적합하였다.

(2) 목활자와 도활자

1) 목활자의 종류

목활자는 금속활자처럼 주자소 등에서 정책적으로 제작된 것이 아니고 서원이나 사가에서 만들어진 것들이 많아 활자의 계통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기가 어렵다. 그러므로 해당 목활자들의 인본에 적혀 있는 간기에 의하여 전해 온 과정을 어느 정도 밝힐 수 있을 뿐이며 글자 형태에 따라 같은 종류의 인본들을 분류할 수 있다.

이들 목활자의 인본은 전기에는 주로 관서에서 찍은 것들이 많은 반면 후기로 올수록 민간본이 많이 나타나고 있는데, 현존하는 인본들을 중심으로 주요 목활자의 종류를 개략하면 다음과 같다.

서적원자 태조 4년(1395) 서찬이 만들어 서적원에 바침으로써 《대명률직해》를 찍어서 반포했다. 본 활자는 건국 초에 서적원이 아직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할 때 지방 관서가 만들어 바친 것이지만, 조선조에 들어와 최초로 만들어진 활자이고 당시 필요했던 책을 찍어 보급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자못 크다.

녹권자 태조가 개국 후 공신도감을 설치하고 개국 공신과 원종 공신들에게 녹권과 교서를 내려 논공행상을 했는데, 이들을 처음에는 모두 필서로 만들었으나 태조 4년(1395)에는 목활자와 목판인쇄를 병행하면서 사용한 목활자이다. 현존하는 목활자본 중 가장 오래된 것이어서 귀중하게 평가되고 있다.

동국정운자 세종이 우리나라의 한자음을 바르게 잡기 위해 편찬한 통왕 29년(1447)에 《동국정운》을 찍은 목활자로 한자 큰 자를 동국정운자, 한글 큰 자를 동국정운 한글자로 부른다. 활자의 새김이 매우 정교하여 인본에는 필체가 잘 나타나고 있으며, 인쇄 상태 또한 매우 깨끗하다.

홍무정운자 세종이 《동국정운》을 완성하고 또 다시 한자의 중국음을 정확히 나타내기 위해 명나라에서 펴낸《홍무정운》의 음을 한글로 표기하는 작업을 착수하였는데, 오랜 시일이 걸린 탓에 단종 3년(1455)에야 《홍무정운역훈》이 완성되어 인출할 때 사용된 목활자이다.

을유자체자 세조 때 불교서적을 찍어낸 목활자이다. 글자체가 을유자와 닮아 이 이름으로 통칭되며, 제작 연대는 15세기 후반 무렵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하나 하나 손으로 새겼기 때문에 금속활자인 을유자에 비하면 모양이 일정하지 않고 글자획도 가지런하지 않지만, 활자를 만들어 바로 찍어낸 책들을 보면 먹색의 진함과 인쇄의 선명도는 금속활자인 을유자보다 오히려 나은 편이다.

인경자 성종이 승하하자 명복을 빌기 위해 연산군 원년(1495) 원각사에서 대대적으로 불경을 찍고 단일 발문을 작성한 다음 찍어서 모든 책 끝에 똑같이 붙이는데 사용된 목활자이며, 이듬해에는 임금이 불경 간행사업을 직접 도와줌으로써 목활자를 더 만들고 불경을 잇따라 찍어냈다. 글자체는 부드러운 필서체로 새김이 정교하고 인쇄 또한 먹색이 사뭇 진하고 깨끗하여 인본들이 매우 정교하면서도 우아하여 언뜻 보면 금속활자처럼 보인다.

훈련도감자 임진왜란 직후 설치한 훈련도감이 운영경비를 조달하기 위해 유휴 병력을 이용하여 활자를 만들고 교서관을 대신하여 설비를 받아 책을 찍어 줌으로써 경비를 충당하는 방안으로 옛 금속활자의 글자체를 본뜬 각종 목활자를 만들어 다양하게 책을 찍어냈는데, 이때 사용된 목활자들을 총칭한다. 본 목활자는 경험이 없던 병사들이 만들어 글자획도 고르지 않아 인본도 대체로 조잡한 편이다. 그러나 한 나라의 인쇄 업무를 맡은 교서관의 기능이 마비되었을 때 그 업무를 대신 수행하여 인쇄문화 발전에 기여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실록자 임진왜란 직후 실록을 새로 찍기 위해 사용한 목활자이다. 실록처럼 귀중한 문적은 금속활자로 찍어야 했음에도 전란으로 대부분의 금속활자가 소실되어 버린 탓에 갑인자와 을해자를 수집하는 한편, 부족한 활자들은 훈련도감 병사들을 데려 와 목활자로 만들어 보충하였다. 이 중 《선조실록》은 새김이 거친 목활자로만 찍혀져 있어 인쇄상태가 조선 왕조 실록 중 가장 좋지 않으며, 목활자를 대대적으로 만들어 찍은 《인조실록》과 《효종실록》은 글자체가 단정하고 판식이 훨씬 정돈되어 있어 인쇄가 깨끗하고 또렷한 편이다.

교서관 필서체자 현종 때 무신자가 주조되어 중앙 관서의 금속활자 인쇄 업무가 다시 수행되기까지의 사이에 교서관이 갑인자와 을해자의 필서체를 답습한 목활자인데, 많은 책을 찍어 공급하였다.

생생자 정조 16년(1792)에 《강희자전》을 글자본으로 삼아 황양목으로 만든 목활자로 총 32만여 자에 이른다. 본 활자는 조선시대의 목활자 중 가장 대규모로 관서에서 제조한 목활자인데, 철종 8년(1857)의 주자소 화재로 인해 대부분 소실되고 말았다.

학부 인서체자 고종 31년(1894)의 갑오경장으로 인해 설치된 학부가 새로운 문물과 근대화 의식을 수용하기 위해 후기 교서관 인서체자와 이를 바탕으로 인서체 목활자를 만들어 개편된 교과서를 다량으로 찍어냈다.

야소삼자경자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기독교 선교를 위한 《야소삼자경》을 찍기 위해 만든 목활자이다. 인본은 한자로 번역한 기독교 교리의 중요 대목을 큰 한자 밑에 작은 한글자로 훈과 음을 표시하고 끝에는 한글로 토를 달아 인쇄했다. 본 활자의 인본은 3종이 발표되었는데, 아동들에게 기독교를 교육시키려는 것이 주목적이지만, 한편으로는 한자의 초보적 교습을 위한 부차적인 목적도 함께 수행할 수 있도록 엮어진 것이 큰 특징이다.

임진왜란 이전에도 여러 곳에서 목활자를 만들어 사용했기 때문에 현재 전해오는 것만 해도 중종 때 나주목에서 만든 금성자, 명종 때 대제학을 지낸 정사룡이 만든 호음자, 광해군 때 평양에서 만든 추향당자 그리고 선조 18년(1585)에 교정청에서 《효경대의》를 찍기 위해 만든 효경대자의 인본 등 많이 있다.

조선 후기에 들어서는 내의원 같은 중앙관서나 지방관서의 감영은 물론 사찰 또는 민간인들이 사사로이 많은 목활자를 만들어 각종 서책이나 문집, 족보 등을 인출하는 데 사용하였다.

이들 중에는 임진왜란이 끝난 후 선조 41년(1608)부터 광해군 7년(1615)까지의 사이에 내의원의 의관들이 의서를 엮어 찍어낸 내의원자를 비롯해 광해군 13년(1621)에 경상도 관찰사였던 정조가 그의 친구인 문계박에게 의뢰해 만든 문계박자, 17세기 후반에 나주목에서 만든 나주자, 정조 21년(1797)에 《춘추좌씨전》을 인출하면서 사용한 춘추강자, 동왕 22년(1798)에 김한동이 조상의 문집을 찍기 위해 평남 성천에서 만든 성천자등이 있다.

이후에도 많은 목활자가 개인들에 의해 사사로이 만들어졌는데, 순조 10년(1810)에 장혼이 책을 찍기 위해 소형 목활자로 만든 장혼자, 동왕 15년(1815)에 예조판서 등을 지낸 남공철이 자신의 저서를 찍기 위해 만든 금롱취진자, 동왕 25년(1825)에 박병은 등이 《증주삼자경》을 인출하기 위해 만든 훈몽삼자경자 그리고 고종 6년(1869)에 양주의 보광사에서 불서를 찍어내기 위해 만든 보광사자 등 매우 많은 목활자가 있었으며, 이들의 인본 또한 다양하게 전해 오고 있다.

2) 목활자의 제작과 활용

우리나라의 목활자 인쇄에 관한 기록이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현재 전해 오는 금속활자본인 《직지》를 면밀히 조사해 볼 때 부족한 글자를 목활자로 충당하고 있어, 그 이전부터 목활자가 인쇄에 쓰여졌던 것으로 여겨진다.

목활자의 제작 방법을 소상히 소개하고 있는 책으로는 조선 후기의 실학자인 서유구의 《임원십육지》등이 있는데, 이들 기록을 참작하여 목활자 제작법을 개략하면 다음과 같다.

금속활자의 경우와 같이 먼저 글자본을 정하고, 이를 명필가에게 크고 작은 활자의 규격에 따라 글자를 쓰게 하거나 기존의 금속활자 인본의 글자 등을 이용하기도 했다. 활자를 샛길 나무를 적당한 크기의 판자로 켜서 판면을 고르고 편편하게 대패질을 한 다음 새기고자 하는 활자 크기와 높이의 각목으로 만들었다. 목활자로 쓰이는 재료는 글자를 새기기 쉽게 재질이 연하면서도 오래 견딜 수 있고 먹물 흡수가 좋아 인쇄가 잘 될 뿐만 아니라 구하기 쉬운 나무를 사용했다. 준비된 글자본을 각목 위해 뒤집어 붙이고 비쳐 보이는 글자체의 획이 볼록 나오도록 하여 하나한 새긴 다음, 이를 다시 실톱으로 하나씩 잘라 네 면의 모양을 가지런하게 하고 높이를 일정하도록 손질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완성된 목활자는 활자의 배열법에 따라 보관함에 정돈한 다음 서책을 인쇄할 때마다 꺼내어 사용하였다.

목활자로 책을 찍어내기 위해 판을 짜는 데도 금속활자 인쇄처럼 고착식과 조립식이 있었다. 관서에서는 금속활자의 인쇄 방법에 준하여 조립식을 많이 사용했지만, 민간에서는 주로 고착식 인쇄 방법을 사용했다.

3) 도활자

도활자란 질그릇 만드는 찰흙을 빚어 만든 활자로 오지활자라고도 한다. 도활자는 18세기 초반에 만들어진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도활자는 《동국후생신록》에 이재항이 해주 병영에서 친히 글자를 써 토주를 구워 냈다고 밝히고 있다. 토주를 구어 내는 방법과 과정에 대해서는 찰흙을 곱게 빻은 후 기름을 섞어서 활자 모양의 네모꼴을 만들고, 이것을 햇볕에서 반쯤 말린 다음 글자본을 쓴 얇은 종이를 뒤집어 붙여서 그대로 새기고 불에 구워 하나씩 만들어 낸다고 설명하고 있다.

현존하는 도활자의 모퉁이에는 구멍이 뚫려 있는 것이 많은데, 이는 인쇄판을 짤 때 철사나 끈으로 꿰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도활자는 금속활자처럼 글자형이 고르지는 못하나 비교적 균형이 잘 짜여져 있고, 활자의 재질도 견고하여 목활자처럼 쉽게 형체가 이지러지지 않아 언뜻 보면 철활자와 비슷한 느낌을 주고 있다. 그러나 도활자의 인본은 극히 드문데, 이것은 도활자의 주조 과정이 금속활자와 비슷하므로 목활자를 만드는 것보다는 매우 힘들며, 보관 또한 재질이 목활자보다는 견고하나 역시 잘 이지러졌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3) 목판 인쇄술

1) 불경의 인쇄

조선 건국 초기에는 고려 때의 서적원을 그대로 계승하였고 대장경판의 인쇄나 각 사찰의 간경사업도 그대로 계승되었다. 태조 즉위기간에는 서너 종의 대장경판이 판각되었으며 왕사였던 무학대사의 《주심부》를 복각하기도 하였다. 세조는 일찍이 불경에 흥미를 느껴 왕위에 오르기 전에는 세종의 뜻을 받들어 《석보상절》을 편찬하였다. 왕위에 오른 뒤에도 《석보상절》과 《월인천강지곡》을 합하여 《월인석보》를 간행하고, 간경도감을 설치하여 대장경판 이외의 불전들을 널리 수집하여 펴내고 외국 불전들의 국역 간행사업도 힘썼다.

그러나 세조가 세상을 떠나자 유신들의 거센 반발에 부딪혀 간경도감이 폐쇄되었고, 이듬해에는 인수대비가 직접 간경사업에 간여하여 각처에 분산되어 있는 판본들의 소재처에서 불전들을 복간하게 하였다. 이때 간행된 인본들은 글자체가 단정하고 글자획의 조각이 정교한 것이 많다. 인수대비는 또한 목활자를 만들어 불전을 인출하였는데, 이 목활자를 인경 목활자라고 한다.

2) 관판 및 사판

금속활자와 목활자가 널리 사용되었던 조선시대에도 목판인쇄는 관서나 사찰, 서원 등에서 활용되면서 많은 서책들을 인출해 냈다. 이 중 관판본은 중앙의 교서관이나 주자소 등에서 인쇄한 국가의 전장과 사서, 왕실의 기록등과 같은 중요한 관찬서의 활자본을 지방의 각 감영에 보내어 관명으로 다시 각판하게 하고, 때로는 처음부터 교서관이나 감영에서 각판하는 것도 있었다. 사판은 크게 나누어 사찰판과 서원판, 사가판으로 구분할 수 있다. 사찰판은 국가 지원의 간경 사업에 힘입어 크게 번창했으며, 사가판은 가문을 중시하는 풍조가 왕성해짐에 따라 선조들의 문집을 간행하여 가문을 빛내고자 하는 목적에서 성행하게 되었다.

이에 반해 서원판은 조선조 중기 무렵부너 생겨난 서원에서 간행한 것으로 후기 들어서 성행하였으며, 사가판에 속하는 방각판은 조선 후기에 본격적으로 나타났다.

3) 판각 및 인쇄방법

목판본은 글자와 그림을 새긴 목판에서 찍어 낸 책을 말하며, 판각본, 판본, 각본, 조판본, 개판본 등 다양한 용어가 쓰이고 있다. 판목은 주로 박달나무, 돌배나무, 자각나무, 후박나무 등을 적당한 크기로 켜서 바닷물에 담가 송진을 배고 살충을 한 다음 건조시키는 과정을 밟았다. 그런 다음 판목의 양 끝에 마구리를 붙이는 작업을 했다.

판목에 글자를 새기는 절차는 먼저 적작물의 본문을 새기고자 하는 판식 및 계선을 갖춘 얇은 한지에 글씨를 깨끗이 정서했다. 이 같은 서본을 판목 위에 뒤집어 붙이고 글자체의 자획과 판식을 각수가 새기며, 한 판의 새김을 마치면 그 판에 해당하는 권이나 장을 새기고 끝판에는 간기와 각수 이름을 표시했다. 판목의 글자 새김이 끝나면 본문을 검토하여 교정을 했는데, 이런 과정을 거쳐 판각해 낸 것을 판목·각판·책판이라 일컬으며, 불경인 경우는 경판이라고도 한다.

목판본의 인쇄는 주로 소나무를 태워 만든 그을음과 아교를 녹여 섞어서 만든 송연먹을 사용했는데, 먹을 갈아 먹물 그릇에 담아 두었다가 인쇄할 때는 술이나 알콜성 물질을 섞어 사용했다. 이는 먹물이 골로루 침투하면서도 증발이 빨라 번지지 않고 아교의 응결을 촉진시켜 윤기를 내게 하기 위해서였다.

종이는 주로 닥종이가 사용되었다. 닥나무 껍질을 물에 넣고 삶아서 찧은 다음 표백하여 풀을 섞어 치밀한 대발로 떠서 만드는데, 장지와 같은 상품은 사뭇 질겨서 오랫동안 보존할 수 있었다. 인쇄하는 방법은 찍고자 하는 목판의 글자가 위로 향하도록 평평히 놓고 글자면에 말총 등으로 만든 인체에 밀랍 또는 기름을 칠하여 위 아래로 골로루 가볍게 비벼서 박았다. 인쇄가 끝나면 판목을 깨끗이 닦아 말린 다음 통풍이 잘 되는 곳에 보관하였다.

(4) 인쇄기관과 직제

조선시대 최초의 인쇄기관인 서적원은 원래 고려 마지막 왕인 공양왕 4년(1392), 즉 조선 태조 원년 1월에 금속활자 인쇄를 전담하기 위해 설치했던 기관이다. 태조는 즉위 후 고려 말의 제도를 그대로 계승하였는데, 서적원도 고려의 명칭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으로 영과 승등의 직제 아래 각종 서적을 인출했다. 태종 원년(1401)에 이르러 관제를 정비하였는데, 태조 대의 교서감을 교서관으로 개칭하여 인쇄 업무를 담당케 했다.

또한, 이와는 별도로 태종 3년(1403)에는 주자소를 철치하여 동활자를 주조하였는데, 이것이 조선조 최초의 금속활자인 계미자이다. 주자소는 설치 이후 명칭이 바뀌고 역할이 달라지기도 했는데, 문종 때는 정음청으로서 주자 인서의 일을 일부 대행하게 했고, 단종 때는 궁내에 설치했던 서방을 주자소에 귀속시켰다. 주자소는 세종 11년(1429) 이후에는 목판본까지 관장했지만, 세조 6년(1460)에는 목판본 인쇄를 전담하던 교서관에 병합시킴으러써 교서관은 금속활자의 주조와 함께 목판본과 금속활자본까지 담당하는 기관이 되었다.

교서관은 세조 12년(1466) 전교서로 개청되면서 기구가 축소되었으나 성종 15년(1484)에 다시 교서관으로 환원되었다. 교서관은 그후 예각, 내서, 비서, 전교, 외각 등의 별칭으로 불리면서 서적의 인쇄와 출판 업무를 담당하였으며, 규장각이 설치된 영조 52년(1776)의 이듬해인 정조 원년(1777)에 규장각에 합속되어 규장외각으로 개칭되었다. 정조 18년(1794)에는 내각에 수장되었던 금속활자를 창경궁으로 이장하고 주자소라는 옛 이름을 그대로 복구시켰다.

그리고 철종 8년(1857)에는 주자소가 화재로 소실되자 다음 해에는 활자의 주조 및 보관 업무를 규장각으로 이관시켜 금속활자본 외에도 많은 목판까지 소장, 관리하면서 서책들을 인출해 냈다.

근대

(1) 개화기의 인쇄

1) 근대 인쇄술의 전래 우리나라의 근대 인쇄는 일반적으로 서양의 신문물의 유입으로 납활자와 근대식 인쇄기가 처음으로 도입된 1883년부터 시작되었다. 근대 인쇄술이 도입됨으로써 국내에서 독창적으로 발전되어 오던 인쇄기술이 외부로부터의 영향에 힘입어 발전하게 되었고, 인쇄소가 비로소 기업 형태를 띠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근대식 납활자와 인쇄물은 중국과 일본을 거점으로 하고 있던 기독교 세력에 의해 제작되고 도입되었다. 최초의 근대식 한글 납활자는 1880년(고종 17) 성경을 출판하기 위해 일본에 주재하던 프랑스의 천주교 신부인 리델(Ridel)의 지도 아래 최지혁이 쓴 글자를 글자본으로 하여 일본 요코하마에서 주조되었다. 이와는 별도로 개신교에서는 1882년에 처음으로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을 만주 봉천과 우장에서 간행하였다. 우리나라에 근대식 납활자와 활판 인쇄술이 처음으로 도입된 것은 1881년 12월 10일 부산에서 창간된 〈조선신보〉를 기점으로 한다. 이는 부산에 거주하던 일본인 상인단체의 기관지로 발행된 것인데, 발간 주체가 비록 일본인이었지만 국내에서 근대식 납활자를 최초로 사용한 인쇄물이었다.

우리 민족에 의해 직접 수입된 근대식 납활자와 활판 인쇄술은 1883년 새로운 문물과 제도에 따르면 신문과 서책들을 출판하기 위하여 박문국을 설치하고 〈한성순보〉를 발간하면서부터이다. 그러나 근대 인쇄술의 도입

기운은 그 이전부터 이미 싹트고 있었다. 1876년 2월 병자수호조약을 체결된 이후 파견된 수신사 일행은 2개월간에 걸쳐 일본의 관공서와 산업시설 등을 견학하였다. 이때 수신사의 일원이었던 김기수는 《일동기유》를 저술해 이리본의 근대 문물을 소개했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활자 인쇄의 정교함과 신속함에 감탄하고 신문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조선 정부는 1881년 신사유람단을 파견하여 조지소와 인쇄소 등을 시찰하게 했는데, 이때 일본에 갔던 박영효가 귀국 길에 신문 발행에 필요한 납활자와 활판 인쇄기 등의 시설과 함께 신문제작을 도와 줄 인쇄 기술자까지 데리고 왔다.

박문국은 1883년 10월 1일 일본에서 수입한 근대식 납활자와 활판 인쇄기로 〈한성순보〉를 간행하여 공보 중심으로 시사적인 내용을 게제하였는데, 이것이 우리나라에서 발행된 최초의 신문이다. 신문은 순한문을 사용하여 양지에 책자 형태로 발간되었는데 소형 수동 원압식 활판 인쇄기를 이용하여 찍었다. 그러나 갑신정변 이후 수구파들의 선동으로 박문국이 파괴되면서 활자 및 인쇄시설이 모두 불타게 되어 〈한성순보〉의 발행은 중단되었다.

하지만 수구파도 신문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되어 1886년 1월에는 〈한성주보〉라는 이름으로 복간하였다. 이때는 국한문을 혼용해 제작했는데, 이것이 국내 최초의 신문체이다. 그러나 〈한성주보〉는 운영난을 겪다가 창간 2년반 만인 1888년 7월에 폐간되고 말았다.

1884년에는 최초의 근대식 민간 인쇄업체인 광인사인쇄공자가 설립되었다. 광인사는 원래 목활자로 인쇄를 하던 반판반민의 재래식 인쇄소였으나 일본에서 활판 인쇄기와 납활자를 도입하여 서양식 인쇄시설을 갖추고 새롭게 출범했는데, 인쇄와 출판을 겸하면서 활판 인쇄술의 보급에도 크게 기여했다. 근대 활판 인쇄술의 보급과 발달은 선교 단체들의 인쇄소로부터도 많은 도움을 받았다. 천주교의 성서활판소, 개신교의 배재학당인쇄소, 안식일교의 시조사인쇄소, 천도교의 보성사인쇄소 등은 활판 인쇄술의 보급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들 중 미국의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가 1886년 최초의 근대식 교육기관인 배제학당 안에 활판인쇄 시설을 갖춘 배제학당인쇄부는 처음에는 주로 기독교 선교 전단과 책자를 발행하다가 1889년에는 선교사이자 인쇄 기술자인 옵링거(Rev F. Ohlinger)를 초빙하여 종교소설인 《텬로력명》을 발간하였다. 이 책은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출판된 서양 장편소설이자 국문으로 번역된 단행본이다.

배제학당 인쇄부는 더욱 발전하여 1892년에는 영문 활자의 한글 활자를 직접 주조할 만큼 근대식 인쇄시설을 갖추었고, 1895년에는 중국 상해에서 대량의 자모를 구입해 오는 한편 제본소를 따로 설치하기도 하였다. 특히, 1896년(고종 33) 4월 7일에 창간된 《독립신문》이 인쇄할 수 있도록 적극 후원하기도 했으며, 이듬해 2월부터는 아펜젤러에 의해 《조선 그리스도인 회보》라는 한글판 주간지를 발간하기도 했다.

이처럼 국내에 도입된 납활자와 근대식 활판 인쇄술은 그 편리성과 효용성이 알려지면서 널리 보급되기 시작하였다. 납활자를 이용한 인쇄방식은 종래의 수공업적인 인쇄기구에 의한 것과는 달리 기계화가 된 것이며, 재래식 활자로는 주로 한자 인쇄물을 발행하고 있을 때 납활자로 찍은 인쇄물은 국한문을 혼용하거나 순한글만을 사용하여 인쇄하였다.

2) 관영 인쇄소의 설립 근대식 납활자가 도입되고 나서도 한동안 주자소에 있던 정유자나 정리자 등의 고활자를 사용하거나 새로 도입한 납활자를 병용하기도 했다. 특히 갑오개혁 이후에도 학부에서는 단독으로 인서체 목활자를 만들어 많은 교과서를 인촐하기도 했다. 이처럼 납활자는 도입 직후에는 작은 활자를 필요로 하는 인쇄물 등에 국한적으로 사용되다가 점차 공공 인쇄는 물론 민간 인쇄에도 많이 이용되었다. 그러나 당시 조정에서는 외국에서 인쇄하여 수입하던 우표와 엽서 등을 직접 인쇄하기 위해 1896년 관영 인쇄소를 설치하고, 일본에서 조각사 및 인쇄 기술자를 초빙하여 1899년 최초의 우표 시제품을 인쇄하였으며, 1900년 3월에는 농상공부에 인쇄

국을설치하여 중앙관서의 국으로 정식 발족시켰다.

1901년 2월에는 상설 주전소인 전환국에 기존의 주조과 외에 인쇄과를 신설했다. 이후 농상공부의 인쇄국을 폐지하고 인쇄시설 일체를 전환국으로 옮김에 따라 일본인 기술자들도 모두 전속되었다. 전환국의 인쇄시설은 모두 독일에서 도입한 것이었으며, 각 부서의 책임자는 모두 일본인이었다.

1904년에는 일본인 메가타가 탁지부에 새로 인쇄국을 설치하여 전환국의 인쇄시설과 제지공장을 이어 받았다. 인쇄국은 1906년의 화재로 각종 인쇄시설이 불탔으나 대대적인 복구 작업을 거쳐 1909년에는 인쇄공장과 제지공장이 중축되고 관련설비 등이 크게 확충되었다. 특히 인쇄국에는 활판과 석판 인쇄 시설 외에도 활자 주조 시설, 인쇄잉크 제조 시설 등을 갖추게 되었고, 전기도금판과 사진 제판술까지 도입되었다.

3) 민간 인쇄업체의 등장 신문물 도입의 영향으로 늘어나는 서책 등 인쇄물의 수요가 늘어나자 최초의 근대식 민간 인쇄업체인 광인사를 기점으로 민간인들의 인쇄업 참여가 이뤄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민간 기업으로서 규모가 짜인 인쇄업체는 1900년대에 들어와 등장했는데, 이 무렵의 대표적인 인쇄소는 광문사와 박문사이다. 광문사는 활판 조판과 인쇄시설을 갖추었고 박문사는 활자의 주조 시설 및 양장 제본시설까지 갖춘 종합 인쇄소였다.

1905년에는 보성사가 설립되었는데, 이 회사는 8면 활판기 등을 독일에서 수입하고 석판 인쇄 시설까지 갖춰 당신 한국인 인쇄소로서는 시설이 가장 좋았다. 1908년에는 최남선에 의해 신문관과 보인사가 설립되었다. 신문관에서는 최초의 근대 종합잡지인 《소년》을 펴냈으며, 보인사는 활판 시설 외에 석판기와 사진 제판부, 제책부까지 갖추고 있었다. 한일합방 전 지방의 인쇄소로는 김홍조 등이 언론이 ㄴ출신 장지연을 초빙하여 1909년 10월 진주에 설립한 경남일보 인쇄소가 유명했다. 이 인쇄소는 한국인 인쇄소로는 최초의 법인체였는데, 인쇄시설을 고루 갖춰 자체 신문 발행은 물론 외부 인쇄물까지 취급할 정도로 규모가 상당히 컸다.

(2) 일제시대의 인쇄

1) 한일합방 직후의 인쇄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방이 이루어지자 일본은 통감부를 폐지시키고 새로운 식민지 통치기구로 총독부를 설치하였다. 합방 전에도 이미 일본인 인쇄소가 업계를 장악하고 있었는데, 합방 후 불과 2∼3년 내에 전체 인쇄업계의 8할 이상을 점유하게 되었다. 특히, 새로 개편된 총독부 인쇄공장은 한국인 인쇄업체를 위협하는 존재가 되었다. 구한말의 탁지부 인쇄국도 총독부 직할로 되어 명칭도 총독부 인쇄국으로 바뀌었다. 총독부는 1910년 11월 《초등대한역사》, 《대한지지》등 51종의 서적을 판매 금지시키고 모두 압수하였다. 총독부는 이어서 한국인이 신문사를 모두 폐쇄시키고 〈대한매일신문〉을 접수하여 총독부 기관지로 조선어판인 〈매일신보〉와 자배지인 일본어판 〈경성일보〉를 발행하였다. 이 때문에 한일합방 이후 3·1운동이 일어나던 1919년까지는 인쇄·출판문화의 암흑기가 초래되어 인쇄업계는 크게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1910년대에 신설된 한국인 인쇄소는 몇 개 업체에 불과했는데, 1912년 8월에는 보진재인쇄소가 창립되어 초창기에는 주로 석판 인쇄를 하였고, 성문사, 복음인쇄소, 문아당 등이 이 무렵에 설립되었다. 그러나 이때는 이미 서울의 인쇄소 대부분이 일본인들에 의해 장악되고 있었으며, 날로 위축되기만 하던 인쇄업이 3·1 운동을 계기로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차츰 활기를 되찾기 시작하였다.

2) 3·1운동 전후의 인쇄 1919년 3월 1일에 일어난 기미독립운동은 우리 민족사에 길이 남을 만큼 거국적인 독립운동이었기에 인쇄인들도 이 운동에 기여한 바가 적지 않았다. 최남선이 작성한 독립선언문은 그가 운영하던 신문관에서 조판하고 민족 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인 이종일의 보성사에서 인쇄했다. 뒷날 이 사실이 일본 경찰에 발각되어 이종일과 인쇄 기술자들은 모두 투옥되었고 보성사는 관헌에 의해 불태워지는 수난을 겪었다. 이때부터 한국인이 경영하는 인쇄소는 모두 등록을 하게 되었고 사찰 대상이 되어 노골적인 탄압이 가해지게 되었다.

1920년 1월에는 소위 문화정치를 표방한 인체에 의해 〈조선일보〉, 〈동아일보〉, 〈시사신문〉의 발행이 허가되었다.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창간 당시에는 자체 인쇄 시설이 없어 민간 인쇄업체에서 인쇄를 하였으나, 얼마 후 조판 시설과 윤전기 등을 갖추고 자체 시설로써 신문을 발행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무렵에는 비교적 규모가 큰 한국인 인쇄고가 잇따라 설립되었다. 1919년에는 신의주인쇄소가 설립되었고, 1920년에는 대동인쇄주식회사가 서울에서 설립된 것을 비롯해 훗날 서울로 진출한 평화당인쇄소가 황해도 사리원에서 사업을 시작하였다.

또한, 중외인쇄출판사의 전신인 의성인쇄소가 경북 의성에서, 한성도서가 서울에서 각각 설립되었다. 일본인 합자회사인 곡강상점, 대해당 등도 이 무렵에 창업되었으며, 인쇄기술도 발전된 면모를 보여 활판, 석판 외에도 콜로타이프와 오프셋까지도 점차 보급되기 시작하였다.

1923년는 당시 국내에서는 규모가 가장 큰 조선서적주식회사가 설립되어 일한 도서인쇄의 후신인 조선인쇄주식회사와 함께 쌍벽을 이루게 됨으로써 대규모 일본인 인쇄소 시대가 열렸다. 이 밖에도 일본인 인쇄소로는 근택인쇄소, 대해당인쇄소, 조선단식인쇄소 등 규모가 꽤 공장들이 많았는데, 이들은 한국인 인쇄소들보다 규모가 크고 시설도 최신식이었으며, 특히 사진제판 기술은 철저한 비밀주의로 인해 일본인들이 거의 독점하다시피 했다.

3) 인쇄업계의 성장과 시련 1920년대는 경향 각지에서 많은 인쇄소가 새로 설립되어 발전을 거듭했는데, 이때 들어 인쇄 시설이 크게 증설되었음은 물론 모노타이프, 그라비어 등이 처음으로 소개되었고 오프셋 인쇄와 자동화 시설 등의 보급도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특히, 1920년 10월 1일에는 사상 최초의 인쇄 전람회가 개최되어 많은 관심을 끌었다. 총독부 박물관에서 목판과 금속활자, 인쇄 도구 등을 출품하고 전환국 인쇄시설을 계승한 용산인쇄소 등에서 당시의 납활자와 석판, 사진동판 등을 전시하여 인쇄역사를 알 수 있게 했다.

1930년대에는 한국인 인쇄소들이 많이 생겨났고 시설도 중대되었으나,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발발하면서부터는 계속 침체하게 되었다. 1940년을 전후해서도 대규모 인쇄소들이 많이 출현했지만, 각급 학교에서의 조선어과 폐지, 창씨 개명의 강요 등 한민족 말살 정책이 강화되어 인쇄업계는 도산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특히, 1942년에는 조선어학회 사건을 날조한 이후 인쇄소에서는 우리글 인쇄물이 완전히 자취를 감추게 되고 일본어만이 사용되었다.

4) 인쇄동업조합 일제시대 때는 인쇄동업조합이 처음으로 생겨나 운영되었다. 국내에서 결성된 최초의 인쇄동업조합은 일본인 인쇄업자들의 친목단체로부터 출발하였는데, 일본인 인쇄업자들은 1907년 5월 5일 경성인쇄업조합 창립총회를 열었다. 이 조합이 표면적인 활동에 나선 것은 1922년으로 당시 총독부 관방인쇄국의 불하설이 나돌자 일본인 인쇄인들이 타격을 입을 것이라하여 불하 저지운동을 전개하였다.

1929년에는 서울에서 개최될 박람회에서 사용할 각종 인쇄물을 일본에서 인쇄해 오려하자 대표단을 총독부에 보내 일본 발주를 반대하는 운동에 나섰다. 경성인쇄업조합은 이렇듯 전체 인쇄인들의 지위향상이나 기술개발, 경영개선 등의 사업보다는 일본인 인쇄업자들의 권익보호와 공동 관심사 해소를 위하고 상호간의 친목을 도모하는 수준에 그쳤다. 1921년에는 서울의 한국인 인쇄공동들이 인쇄직공친목회를 결성하고 〈인공회보〉를 발간하기도 했다.

이 친목회는 점차 발전하여 〈인공회보〉를 〈연우〉로 개칭하여 발간하고, 1925년에는 보다 조직적인 힘을 과시하기 위해 조선인쇄직공청년 동맹을 결성하려 했으나 총독부에 의해 제지당하고 말았다.

한국 인쇄인들의 최초의 동업조합인 부산인쇄직공조합도 생겨났는데, 1925년 11월 노동쟁의를 일으켜 일본인들 중심의 부산인쇄조합을 상대로 단체교섭을 벌여 성과를 거뒀다. 1926년 4월에는 함북 나남의 인쇄직공친목회에서 나남활판인쇄조합과 처우개선 등에 대해 단체교섭을 벌였으며, 1927년 7월에는 경성인쇄직공조합이 결성되어 일본인들에게 대항해 나갔다.

그러나 한국인 인쇄동업조합은 경영자 중심의 일본인 조합과는 달리 근로자들 중심으로 활동했고 친목단체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한편, 일본은 중일전쟁으로 전선이 확대되자 1938년 ‘국가총동원령’을 공포하여 전시 체계로 편성하였고, 총독부는 관계법령을 제정, 공포하고 동업조합의 결성을 강제하기에 이르렀다.

일제는 동업조합을 통해서 물자를 공급하고 시설 및 생산을 통제하기 위해 한국인 인쇄업자까지 조합에 가입시켰다. 또한 통제의 실효를 거두기 위해서 조합원 자격을 대폭 원화하고 인쇄 기술자들을 모두 등록시켜 직장을 자유롭게 이동할 수 없도록 계획을 세웠다. 이 같은 방침에 따라 경성인쇄조합이 새롭게 결성되어 1939년 6월 17일 창립총회를 갖고 출범하였다.

경성인쇄조합은 당초부터 관제 조직의 성격을 띄었던 탓에 인쇄업자들에 의해 자발적으로 조직된 동업조합과는 성격이 달랐다. 조합은 조합원사가 보유한 인쇄기계를 모두 등록시키고 기술자들의 이동과 임금까지도 통제하였으며, 인쇄용지는 물론 잉크와 아연괘, 제책용 봉사에 이르기까지 모든 물자를 통제하였다. 경성인쇄조합은 1940년 서울시 중구 저동에 연건평 40평 2층 규모로 사무실을 신축했다. 그러나 창고가 없어서 불편을 겪자 1942년에는 공장을 중축하고 창고까지 신축하였는데, 이 건물은 1962년까지 인쇄 단체의 사무실로 사용되었다.

1943년 2월 17일에는 경성인쇄공업조합이 당국의 지시에 따라 경기도인쇄공업조합으로 확대 개편한 후 서울과 경기도에 있던 인쇄업체를 조합원으로 받아들여 조직을 정비했는데, 이때의 조합원사는 총 184개였다. 한편, 조선총독부는 1943년부터 물자 공급을 일원화하기 위하여 실수요자 단체인 동업조합 중앙연합회에 배당하고 이를 다시 각도의 동업조합으로 할당할 계획을 수립했다.

이에 따라 인쇄업계도 경성인쇄공업조합을 모체로 한 중앙연합회를 조직하기 위해 1942년 12월 20일에는 조선인쇄연합회 창립총회를 개최하였다. 1943년부터는 인쇄용지 등 모든 물자가 조선인쇄연합회에 배정되었고 연합회에서는 이를 각도의 인쇄공업조합으로 할당하였다. 그러나 1945년 들어 전세가 더욱 악화되면서 총독부에서는 모든 물자를 각도로 직접 배당하고 도에서는 동업조합으로 배급하게 되었다. 따라서, 물자 통제를 위한 기구로 설립된 조선인쇄연합회는 존재 가치가 없어져 1945년 7월에 해체되고 말았다.

<출처:대한인쇄조합연합회 40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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