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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인쇄야사1

마산지역 최초로 근대 인쇄를 시작한 것은 일제시대부터였다고 하지만 언제 어디서 누가 했는지 아는 인쇄인은 현재로는 아무도 없다. 다만 일제말기 추산동 소재 영창인쇄(대표 강수만)와 남성동 소재 대동인쇄소(대표 서용택) 정도 만 알 수 있을 뿐이다. 해방 후 몇몇 군소인쇄소들이 모여 마산합동인쇄라는 상호로 남성동 파출소 밑에서 운영되어 오던 중 석판, 정판이 분리하여 현 삼명정판(대표 박태만)의 모태가 되어 70년대까지 정판의 독보적 존재로 군림하였다. 그리고 활판인쇄는 각자 분리되어 60년대까지 마산의 인쇄 중심이 된다.

마산 활판의 전성기는 아무래도 60년대 중반부터 90년대 초반까지로 보아야 되지 않을까 싶다. 즉, 한일합섬이 가동되고 자유수출지역에 많은 기업체들이 들어섬으로 해서 그 당시 인쇄소의 숫자나 규모로는 주야로 작업을 해도 넘치는 물량을 소화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프린트, 공판, 석판 등이 일부 역할을 담당했으나 그 당시 인쇄라고 하면 활판이 주종을 이루고 있었으며 80년대까지만 해도 인쇄소에 다닌다고 하면 선도 보지 않고 딸을 주었다는 원로들의 증언이 있고 보면 종업원이 그럴진대 업주들로서는 문화사업을 하면서 경제적으로도 타 업종에 비해 여유가 있으므로 해서 지역 유지의 대우를 받음직하였음을 이를 미루어 알 수 있다 하겠다.

일례로 대동인쇄소 서용택 사장이 한창 때에는-해방직후-은행에서 돈을 찾으면 자루에 넣어 매고 올 정도였으며 어쩌다 요정에라도 갈려치면 기생들이 맨발로 달려 나와 업고 갈 정도로 대접이 좋았다고 한다. 허나 설비면에서는 일본에 비해 열악하기 짝이 없었다.

60년대 초반까지만 하여도 전기 공급이 나빠 수시로 단전이 되곤 하였는데, 이때 발로 활판기계를 밟으며 인쇄를 했으며, 로라도 아교와 설탕을 적당한 비율로 섞어 만든 것으로 겨울철에는 만든 지 얼마 안되어 아교로라가 굳어 다시 만들어 사용하기가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삽화나 마크 등 그림이 필요한 활판인쇄는 아직 동판집이 없는지라 부산이나 외지 등으로 가서 만들어 오거나 그렇지 않으면 고무판에 조각하여 인쇄를 하였는데 고무판 인쇄 면적이 넓으면 고무판 인쇄부분은 허옇게 나와 고르지 못한 상태였지만 당시의 시설로는 더 어찌해 볼 수 없었다.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를 만든 나라는 우리나라(고려)였지만 기술 전수의 미숙으로 근대 활판(납 활자)의 기술은 일제시대 일본으로부터 도입되어 90년대 후반까지 그 맥을 유지하다가 시대의 흐름의 부침에 따라 이제는 그 숫자가 전국적으로 손가락 꼽을 정도로 쇠퇴하고 말았다. 인쇄에 관한 용어 90% 이상이 일본어를 쓰게 된것도 활판, 정판, 사진부 등 인쇄 자체를 일본 기술자에게 배워야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도 그 해악이 남아 있어 학계나 업계 또는 관련 언론에서 우리말 고쳐 쓰기를 전개하여 어느 정도 가시적 효과를 거두고 있기는 하나 활판의 경우는 업 자체가 거의 소멸되어 가니 용어를 쓸 이유가 없는 관계로 하여 운명을 같이하는 아이러니한 현상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그저 허무하기만 하다.

인쇄 후 가공으로 재단은 필수적이다. 60년대 초반까지만 하여도 재단기가 그리 흔하지 않아 종이를 재단할 때는 재다찌 칼로써 재단을 하였다. 전지 재단부터 시야기(마무리)까지 했는데 투바이 각목을 밟고 재다찌칼(중국집 요리칼처럼 생겼음)을 왔다갔다 하면서 써억써억 문지르면 종이가 잘리는데 얼마나 정확히 자르느냐가 경력을 말하였다. 지금의 생각으로는 상상이 안가는 미개의 방식이었다. 그러나 이것도 60년대 후반 이후 본격적으로 생산된 국산재단기 보급으로 세월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만다. 또한 이즈음 인쇄소에 종이를 전문으로 공급하는 지업사(부평지업사)사 생기므로 하여 재단기가 없어 불편했던 군소 업체로는 재단으로 인한 고초는 이로부터 완전 해결되었다.



현존하는 마산 선배 인쇄인으로 권승남(삼진인쇄 대표), 김건(세종인쇄 대표), 강원두(삼영지기 대표) 세 분의 지역 원로 인쇄인에게 초창기 마산인쇄에 관하여 자문을 얻은 결과 해방 전후하여 50년대 후반까지의 마산인쇄의 현황은 타도시와 대동소이하였다. 왜냐하면 60년대 중반까지 우리나라 전반에 걸쳐 아직까지 공업 분야는 걸음마 단계에 있다 보니 인쇄분야 역시 그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였기 때문이 아닌가 쉽다. 어쩌면 일찍부터 군항도시로 형성된 이웃 진해보다 오히려 인쇄시설이나 기술, 규모면에서 훨씬 뒤처져 있었지 않았나 사료된다(註 진해 편에서 상세하게 서술하겠음). 60년대 활판기사로 정현제(76), 이우석(72), 김위생(69), 정판식(67), 이용택(66), 이두건(66 동경인쇄), 강상석(64 동진인쇄), 김건(62 세종인쇄), 권승남(61 삼진인쇄), 심재웅(61), 진병문(57 청문인쇄), 이종도(57 대호정판), 이진균(54 건일인쇄), 최주석(53 홍성인쇄), 이상완(53 동명인쇄), 승만석(53 진우인쇄), 오규선(52 세영인쇄), 전병호(50 영남인쇄) 씨 등이 현재 인쇄 분야에 직?간접으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프린트 기사는 임홍섭, 강만오, 김재열, 김광석, 윤만이, 권영모, 이선조, 성대경(대경인쇄), 노점승(삼오인쇄), 김일용(경남인판) 씨 등이 80년대 초반까지 프린트를 하였으나 80년 초반 청타의 출현으로 프린트는 막을 완전 내리고 말았다. 60년대 후반 서서히 경제개발의 가시적 효과가 나타나면서 우리 마산도 새로운 공업도시로서 면모를 갖추기 시작한다. 즉 한일합섬을 기점으로 하여 마산자유수출지역 설립과 중공업 산업기지를 만들겠다는 야심찬 정부의 계획으로 현대양행(현, 두산중공업)을 비롯한 창업공업단지가 조성되면서부터 마산 인쇄계에도 대단위 인쇄소(정판)가 속속 설립되고 군소 인쇄소가 우후죽순처럼 생기면서 본격적인 마산인쇄계의 중흥기를 맞게 된다.

마산인쇄야사2-정판(옵셋)편-

인쇄 역사를 잠시 살펴보면, 문자가 만들어진 이후 필사, 압인, 날인, 비각(碑刻) 등으로 기록되던 것이 서기 105년 中國채륜(蔡倫)이 종이를 발명함으로 板材를 이용한 木版印刷가 唐나라 때부터 실용이 된다.
금속활자는 고려 1234년에 銅활자로 고금상정예문(古今詳定禮文) 50권이 인쇄되었다는 기록이 있고, 直旨는 1337년에 간행되었다. 1403년부터 주조된 동활자가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癸未字이고, 1436년 최초로 납활자가 생산되는데 이것이 丙子字이다. 서양에서는 1447년 독일 쿠벤베르크가 납활자 주조에 성공하여 1455년 羊皮紙에 "42행 성서"를 간행하게 된다. 1460년경 이탈리아 피너게가 표면을 부식시켜 오목판을 만들어 오목판인쇄(그라비아 인쇄 계통)를 하였고, 1798년 독일의 A. 제네펠터가 대리석에 인쇄잉크로 글을 쓴 다음 질산으로 대리석版을 부식시켜 볼록판(평판)을 만들어 인쇄를 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현재의 정판(옵셋)인쇄의 원조(시초)라 하겠다. 현재의 정판인쇄는 1839년 영국의 폰턴이(感光性 內酸物을 발견, 사진제판의 고안으로 1904년부터 시작되었다.
이렇게 볼 때 18세기 末까지 볼록판(활판).오목판(그라비아)ㆎ평판(정판)의 기본적 인쇄 방법이 고안되었다고 할 수 있겠으며, 정판인쇄는 100년이 지난 오늘 4색 인쇄기는 정판인쇄의 기본이고 양면 12색 인쇄기(로랜드 700, 호주 치펜데일 인쇄회사 2대 보유, 세계 유일)까지 운전되고 있는 실정이고 보면 정판인쇄 발전의 끝은 어디쯤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다.

이제부터 우리 마산의 정판인쇄 분야를 살펴보자.
전편에 약간 기술했듯이 마산의 첫 정판업체는 영창전판사였다. 영창원색인쇄사(대표) 姜수만)는 일제시대인 1930년대 후반 마산시 추산동 76번지(몽고정 위 현재 한일스크린 일대)에서 수동 고모리 4절 1대와 활판시설, 전지 자동재단기 1대, 4절 수동재단기 1대로 활판을 겸한 정판인쇄사를 창업을 하였다. 창업주는 강수만씨 매형(金?)이였는데 강수만씨가 인수하여 社勢를 키웠기에 대부분 인쇄인은 강수만씨를 창업주로 알고 있다.
主인쇄는 장류(醬類), 주류(酒類),香 포장지, 사이다 등의 레텔(상표)과 극장 포스터였다고 한다. 당시 인쇄는 아연판에 전사제판을 하여 인쇄를 하였는데, 전사인쇄란 필름을 이용한 제판이 아니고 아연판에 직접 그리거나 풀칠한 노루지에 화공을 한 후 판에 옮겨 인쇄를 하는 방식이다. 1950년 중반 부산 광복동에 지점을 설립한 후 1957년경 마산 본사를 부산지점에 통합하여 1973년까지 운영하다가 그 해 마산자유수출지역에 동서포장을 설립하여 마산으로 옮기게 된다. 1976년 동서포장을 폐업하고 마산 중앙동에 영창상사를 창업하여 운영하다가 1978년 4월 폐업으로 마산 최초 정판업체이었던 영창정판인쇄사는 인쇄업을 접는다.

(株)三明 p&p(대표이사 朴泰滿)를 이야기하자면 이 지역 대표적 인물인 現 慶南新聞社 제2대 사장을 역임한 김형윤씨에 대한 이야기부터 하여야 한다. 김형윤씨 아호가 목발(目拔: 손으로 눈을 뽑다)인데 이 목발이라는 아호의 유래가 이렇다고 한다. 왜정시대 때 어느 날 버스를 타고 있는데 일본 헌병이 버스에 오르더니 조선인은 모두 일어나라고 하였다 한다 그러나 유독 김형윤씨만은 그대로 앉아 있었다. 화가 난 헌병이 왜 조선인이 건방지게 앉아 있느냐고 하니 "사람은 다 사람인데 왜 조선 사람만 일어나야 하느냐"며 항거를 하는 바람에 그 헌병으로부터 큰 곤욕을 치루었다. 집에 돌아와 아무리 생각을 해도 도저히 분히 풀리지 않자 헌병대로 찾아가 그 헌병의 두 눈을 손가락으로 뽑았다. 그로 인해 온갖 고문과 12년간의 모진 옥살이를 하였지만 그의 기개(氣槪)는 결코 꺽이지 않았다 한다. 이후 目拔은 자연스레 그의 호가 되었다고 한다. 목발은 옥편 한 권을 다 외울 정도의 천재였는데 죽는 날까지 날을 거르지 않고 새벽까지 독서를 하였다 한다. 목발은 경남신문사(당시 南鮮日報) 김종신 초대 사장과 절친한 친구이기도 하였다. 1948년 제2대 남선일보 사장으로 취임하게 되는데 그때 청년 박태만은 편집국 교정담당으로 재직하면서 목발 집에서 기거하게 된다.

그 당시 신문사는 활판으로는 신문을 제작하고 석판옵셋기로는 市中의 상표 인쇄를 하였는데 1957년경 신문사 사정으로 석판옵셋기를 매각하게 되었다.

이 소문을 들은 목발의 사위인 손규모씨가 매입하려고 하였지만 목발은 박태만에게 매각하라는 지시를 하였다. 이에 당시 출판부장인 전國鎭씨와 함께 석판옵섹기를 매입하여 三明精版印刷社을 창업하게 되었다. 三明의 회사명은 당시 三光酒造 孫三權 사장이 해日,달月,별辰의 영원불멸을 상징하는 뜻으로 작명하였다고 한다. 매입 후 약 5년 동안 신문사 안에서 운영을 하다가 1962년 마산시 중앙동 2가 3-12번지(現 중앙건재 자리)로 이전하게 된다.
초창기 인쇄는 三光양조, 부용양조, 白光정종,新光정종, 한목단 등 酒類와 몽고장유, 은하사이다 등 상표, 그리고 각종 과자 포장지가 主流를 이루었다. 중앙동 이전 이후 아끼야마 2절 광주제 4절, 고모리 국반절 등 시설을 확충하면서 사세를 키운다
1960년대 酒類 상표는 금분인쇄가 유행이었는데 아연판으로 금분인쇄를 하면 인쇄를 얼마 못하고 아연판이 녹아서 도저히 인쇄를 할 수 없었다 그래서 1969년도 5절 자동동판기를 구입하여 8색, 9색까지 인쇄를 하였다고 한다,

1960년대 후반 발매된 청자담배의 갑이 금색 베다였다. 이 금색 배다인쇄를 서울 동성사와 부산 동성사에서 정판이 아닌 이 자동동판기로 하였다고 한다. 마산에는 1965년경 삼익피아노 이효기 사장이 파마약 포장지 인쇄를 하기 위하여 부산에서 기계를 구입하였는데 이때 자동 동판기와 같이 온 기사가 장기은씨(작고)로 장석창씨 부친이다. 이 자동동판기는 1970년대도 알미늄판이 개발되어 금색인쇄가 정판으로도 가능하게 됨에 따라 자연스레 사라지고 만다. 1995년 5색인쇄기(독일heidelberg), 1998년 4색인쇄기 (日本 미쓰비시) 도입을 하면서 한층 사세를 키워 오늘에 이른다.
박태만 대표이사와 종업원 42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현재 사용하는 상호명(株)三明 p&p는 1998년 10월에 개명하였다. 현소재지는 창원시 팔용동 24-15번지이다. 박태만 대표이사는 1986~1988년까지 경남인쇄공업협동조합(현. 울산. 경남인쇄정보산업협동조합) 제10대 이사장을 역임하였다.


韓一綜合印刷(주)대표이사 金祥實)는 1973년 8월 13일 마산시 산호동 408-1번지에서 창업을 하였다. 당시 마산 몇 개 활판인쇄소가 합작하여 주식회사를 만들었는데 오늘의 한일종합인쇄 모태가 된다. 초창기에는 활판 시설과 국판 2절 수동옵셋으로 출발하였으나 마산수출자유지역의 활성으로 1975년 4월 자동옵셋기(독일 하이델)와 사진식자기(ryobi)를 도입하고 1976년 5월 22일 경상남도 輸出生産業體로 지정됨으로 하여 사세가 확장 1976년 8월 마산시 양덕동 155-19번지(고속버스터미널 위,현 대륙사 자리)로 사옥을 신축하여 이전한다.

1978년 국내 최초로 국전옵셋기(nebiolro) 도입을 시작으로 하여 1987년 2색기 대국전 자동옵셋기(planeta)와 5색도대국전 자동옵셋기, 2000년 상업윤전기(komori 38), 신문윤전기(komori & sumitomo). 4색도 대국전 자동옵셋인쇄기(kbaplaneta)에 도입에 이어 2004년도에는 無필름 인쇄 방식인 CTP(독일 하이델베르그사)를 도입하여 생산 공정과 원가 절감을 하는 등 현재까지 끊임없는 시설 투자를 함으로써 마산뿐만 아닌 우리나라 인쇄계를 선도(先導)하고 있다. 1993년 11월 마산시 봉암동 666-20번지(대지 1,000평, 건평 1,000평)에 사옥을 마련하여 이전하였으나 부지의 협소로 2000년 3월 마산시 봉암동 666-21번지를 인수(대지 1,500평, 건평 1,400평)하여 공장을 확장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김상실 대표이사, 김용호 전무이사, 김동균 기획실장과 80여명의 직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김상실 대표이사는 창업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오직 인쇄만을 고수하신 분이다. 70~80년대 타업종에 투자를 하면 인쇄 수익보다 더 많은 수익을 올릴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외곬이라고 해도 좋을만큼 인쇄에 대한 애정과 투자로 일관하였다. 울산ㆍ경남인쇄정보산업협동조합 이사장을 1979년~1986년, 1989~1994년 13년 13년간에 걸쳐 맡으면서 인쇄조합 昌原時代를 연 현 조합사무실을 마련하였다. 2000년 5월 제17대 馬山商工會議所 會長에 이어 2003년 5월 제18대 마산상공회의소 회장 취임으로 전국 최초 상공회의소 회장을 맡은 인쇄인이다. 지역사회 봉사의 일환으로 2003년 10월 18일 자본금 8억을 출연하여 재단법인 "한일상훈장학회"를 설립하였다. 2004년 1차년도 장학금 4천9백만원을 지급(대학생 8명, 고등학생 18명, 마인연 1명, 창신고 3년 오창준 장학금 1백만원)하였고 2005년 2차년도에는 9천3백만원이 지급하였다. 마산인쇄인을 위하여 작년에 이어 올해에는 2명의 고등학생을 선정하여 연간 1백만원의 장학금을 졸업까지 지급하기로 하였다.


(株)源堂(대표이사 都基百)은 1974년 5월 마산시 두월동에서 당시 경남대학교 도기백 교수의 부친(都盛特)이 활판시설로 창업(원당인쇄사)하였다.
1983년도 도기백 대표이사가 교수직을 사퇴하고 마산시 산호동 17-55번지(현 상공회의소 옆)로 이전하고 Sakurai Oliver T3절 옵셋기를 도입하면서부터 본격적인 옵셋인쇄를 하게 되었다. 1988년 마산시 신포동(현 대한통운)으로 이전하면서 원당정판인쇄사로 상호 변경을 하였고, 이해 고모리 국전을 도입하였다. 1994년 사세 확장으로 마산시 봉암동 660-70번지(대지 250평, 건평 420평)에 사옥을 마련하였고 2001년 7월 상호를 (주)원당으로 개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99년 12월 국내 인쇄업계 최초로 ISO 9001 인증등록에 이어 2003년 12월 ISO 14001 인증 등록을 하였다.1994년 독일 2색기 planeta옵셋기 도입을 시작으로 2002년 4색기 4대(로랜드R 2대, 미쯔비시E 1대, 대국전 밀러 1대)에 이어 올해에는 첨단 장치가 부착된 아시아 최초의 6색기 로랜드706PLV를 도입하였다. 이 정판기는 6색 인쇄와 동시 선택적으로 IR코팅과 Uv인쇄까지 가능하며 아시아 최초로 Eagle-Eye와 In line-sorter를 장착한 정판기이기도 하다. 현재 제2공장을 봉암공단(대지 652평, 연건평 1,239평, 무학소주 옆)내에 신축하여 5월 입주를 앞두고 있다. 도기백 대표이사, 도경호 부사장, 도재호 상무와 86명의 종업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4회, 제15회 마인연 체육대회 때 회사 단일팀으로 참가하여 지역 인쇄인 간의 교류를 통한 좋은 이미지를 심기도 하였다. 도기백 대표이사는 현재 봉암공단협의회 부회장직을 맡고 있으며, 본 연합회 고문이시기도 하다.

(株)和成(대표이사 李容日)은 1980년 7월 화성인쇄사로 마산시 산호동에서 경인쇄용 게스터티나 1대로 창업하였다. 1981년 산호동 한강주유소 앞으로 이전하면서 활판시설과 고모리 국판 2절 자동옵셋기를 도입함으로 본격적인 인쇄를 시작하게 되었다. 1983년 마산시 양덕동(한일로타리~양덕파출소쪽)에 이어 1988년 마산시 양덕동 19-7번지(남해고속도로 동마산 l.c진입로 입구)에 사옥을 마련하고 1990년에는 지역 최초로 DPT시스템을 도입하여 PDF 활용 등 인쇄업계의 트랜드를 리드한다. 1999년 마산시 양덕동 150-19번지(고속터미널 맞은편)에 신사옥을 마련하여 이전하면서 회사명을 (주)화성프린트로 개칭하였다. 이 때를 기하여 한강 이남 최초로 라이너203 사진출력기를 도입하였다. 2004년 10월 창원시 팔용동 24-2번지(대지 1,000평, 건평 1,200평)에 신사옥을 마련하여 이전하면서 24년간의 마산 시대를 접고 새로이 창원 시대를 열게 된다. 설비 확충으로 미쯔비시 5색 옵셋인쇄기를 도입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ISO9001, ISO14001과 인쇄업체로는 드물게 클린사업장 인증을 갖추고 있다. 이용일 사장, 장진수 전무, 장경국 상무와 49명의 종업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2004년 8월부터 자본금 5억으로 가칭 "화성장학회" 법인을 추진 중에 있으며 올 1월에는 우선적으로 중고생 12명에게 1,200만원의 장학금을 지급하였다. 지금까지 마산을 발판으로 한 대표적 정판업체를 살펴 보았다. 이 외 마산에 산재한 정판업체와 明滅이 점철 된 업체에 관한 이야기를 본 회보 3호에 게재하기로 하고 현재 생존한 정판 출신 기사에 대하여 알아보자.

김이규(74), 홍우식(71), 이천우(67, 장원정판사), 이치원(64, 대성정판사), 강수복(64), 최혁근(61, 삼우정판사), 강원두(61, 삼영지기사) 강수덕(58), 김희진(56, 진주), 김구석(54, 삼덕정판사), 이진호(54, 운송업), 문학영(54), 김종갑(51, 선일정판사), 김진흥(50, 삼흥정판사), 천일권(48, 삼신토탈프린트), 한상훈(46, 탑정판사) 씨 등이다.

<출처 : 마산인쇄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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